말세다 말세
수습기간 3개월 중 2달가량이 지났다. 한 달 뒤 나는 협상 테이블에 오른다. 계약서를 쓸 때 CFO가 말했듯 3개월 동안은 회사가 날 평가하는 기간이자, 내가 회사를 평가하는 기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가 나에게 한 이쁜 짓 한 가지만 공개하겠다.
늘 그렇듯, 나-이사님-캐스퍼(덴마크에서 온 인턴 마케터)는 미팅을 위해 클라이언트에게 갔다. 우리 셋, 상대방도 팀장 포함 셋. 회사 분위기 스캔해보니 예상대로 꽤나 딱딱했다. 업계상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이긴 하다.
이사님은 발표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재미없는 발표를 싫어하신다(+1). 듣는 이와 소통도 하면서 우리 서비스를 직접 그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쓰게끔 하시고 졸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신다. 그러다 보니 내용은 많고 시간은 정해져 있어 말이 빠르시긴 하다(-1).
그런데 세명 중 한 명이 조는 게 아닌가... 그것도 팀장이 말이다. 나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어디 하늘 같은 수습직원과 인턴 앞에서 팀장 주제에 존단 말인가... 캐스퍼와 나는 서로 "세상 말세구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팀장은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뭔 말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도통 안 하고 계속 썩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님도 이게 어지간히 거슬렸나 보다.
중간에 할 일 있다고 그 팀장은 나가더라. 세상 너무 좋아졌다. 인턴 앞에서 팀장이 등도 보이고... 하... 따끔하게 말을 해줘야 하나... 앞으로 이 험한 사회를 어떻게 견딜꼬...ㅉㅉ 가여운 팀장 같으니라구... 너그러운 나와 덴마크 젠틀맨은 참기로 했다. 발표가 끝나고 한 분이 외국인을 채용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어봤다. 이때 이사님의 답변이 걸작이다.
만약 제가 마크(나요)처럼 한국인만 고용하면 그냥 제가 일을 시키기만 하고 하대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외국인을 고용하게 되면 제가 자연스럽게 그런 마인드(a.k.a 꼰대)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 (+100)
물론 이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발표를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했던가. 캐스퍼는 해외 시장 및 관련 레퍼런스 다 뒤지고, 나는 국내 시장 및 관련 레퍼런스 다 뒤졌다. 이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 Nothing 야근이고 뭐고 하던 일 다 중단하고 이거에만 며칠을 매달린 거다. 우리가 이 정도 했으니 이사님의 시간 투자는 뭐 말할 것도 없다. 미팅 끝나고 이사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저기 죄송한데, 아까 팀장님 계속 조시더라구요. 저는 이럴 거면 그냥 저분 다음부터 안 들어오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발표하는데 굉장히 불쾌했거든요(+100).
클라이언트 사는 민망해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더라... 나도 겉으로는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엄청 당황했다. 저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나도 몰랐기에.. (그때 내 회사 생활 막 2주 차에 접어들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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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과는? 당연히 거래 성사......되면 드라마고, 불발.
하지만 괜찮다. 클라이언트사 하나를 놓친 대신, 나에게 200점이나 얻었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