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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ㅁㅎ Jul 11. 2020

불안의 쓸모

공감, 자유 그리고 용기

나는 '돌이켜보니 학창 시절에 저를 때린 선생님이 저를 성장하게 해 준 은인이더라구요' 식의 결과론적인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극도의 불안을 겪으며 얻은 게 있지만, 우울증은 겪지 않는 게 최선이다. 고로 이 에피소드는 앞에서 말한 수많은 아픔과는 비교되기 어려운, 사소한 쓸모에 대한 이야기다.


너라면 달랐을까?


 스크린 속 악역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답을 미루면 미룰수록, 내가 믿고 싶은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윤리 공식이 뒤엉킬수록 아이러니하게 그 악역은 나에게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미움만이 있어야 할 공간에 공감이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같은 재벌이지만 베테랑의 조태오보다, 아버지에게 칭찬 한 번 받고자 안간힘 쓰지만 곧잘 따귀나 얻어맞는 이태원클라쓰의 장근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의문투성이 사이코패스인 히스레저의 조커보다 타인에게 행복을 전하고 싶었지만 무례와 폭력 그리고 정신병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나에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공감이란 이처럼 악역에게도 끌리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진다.


네가 가진 결핍, 세윤이가 갖고 있는 결핍, 그리고 나도 결핍이 있다. 이런 결핍이 있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결핍을 어떻게 경험하게 해줘야 할지 고민이다. 결핍은 그 당시에 경험하는 것은 힘들지만, 어려운 시기가 오면 헤쳐 나갈 힘의 원천이 되리라 생각한다.

 신동엽이 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신동엽을 볼 때 야한 농담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을 들은 뒤 나는 신동엽 하면 결핍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에게는 결석과 조퇴로 학년 진급도 버거웠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블랙홀처럼 커다란 결핍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려는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타인에게 얽매이려는 나에게 제동을 걸어준 존재도 사실 이 결핍이다.


 내가 극도로 불안할 때는 조그만 내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극도로 불안할 때는 내방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공간이 나에겐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최대였다. 내가 직접 겪었지만 이따금씩 이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이해가지 않을 때도 있다. 내가 경험한 나의 모습인데도 말이다.


때로는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을 때 나는 침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떠올린다.


내가 저 사람의 침대에 침범했나 보다.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겠지.


때로는 나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시도하려는 친구를 말리고 싶을 때가 있다. "흠... 저렇게 해서는..." 그때 나는 물어본다.


내가 저 사람을, 저 사람의 가능성을 얼마나 알까.


힘들어하는 지인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게 나에게 온전히 전해지고, 그 친구가 나에게는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나의 상상력을 가미한다. 결핍이 나에게 준 첫 선물인 셈이다.


반대방향도 유효하다.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화가 나기 시작하면 질문한다. 


저 사람이 나를 얼마나 알까?

바보처럼 나의 소중한 감정을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려고 하는 나를 구원해준 것도 아이러니하게 결핍이었다.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 어려움은 나를 더 강인하게 만든다.

죽음이 삶보다 더 큰 가치로 나에게 다가오려 할 때, 나는 결핍의 이유를 찾아야 했다. 이 모든 고통이 좋아지는 과정에 있음을, 의미 있는 고통임을 스스로 납득시켜야 했다. 그때 나는 우연히 들은 니체의 저 문장을 자주 곱씹었다. 저 문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니체는 누구인지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유명한 철학자가 했던 말이고, 내 결핍의 이유가 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시작할 때, 본인이 겪은 극한의 고통을 떠올리며 힘을 내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까. 나는 무언가를 처음 할 때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설령 실패해도 조퇴를 하고 집에 오는 길에 빠르게 지나가는 하얀 아반떼를 보며 위험한 고민을 했던 16살의 나보단 나을 것이고, 저 니체의 문장을 한 번 되뇌면 나는 더 강인해질 수 있다 자위할 수 있었다. 과거의 불안이 현재의 나에게 용기를 주는, 모순 가득한 선물이다.


코로나 19가 세계를 휩쓸고 우리의 삶의 양식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피하기 힘들었던 저 결핍의 시간 전으로 나는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나는 '술, 담배 그리고 여자를 통해 지금의 훌륭한 가수가 됐다는 식'의 결과론적인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극도의 불안을 겪으며 얻은 게 있지만, 우울증은 겪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렇기에 이 에피소드는 앞에서 말한 수많은 아픔과는 비교되기 어려운, 사소한 쓸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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