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외톨이
웃음으로 가득한 고등학교 1학년의 수련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을 꾸렸다. 깨끗한 세면도구와 수건, 엄마가 넣어준 간식, 필기도구까지 차곡차곡 챙기면서 마음은 이미 한참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잘 웃는 아이들, 바른 말씨와 맑은 표정. 그들의 사이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이 마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늘 따라잡기 힘든 마음의 파도 속에 휩쓸려 다녔다. 아이들의 날카로운 농담과 이유 없는 장난은 내 마음에 언제나 작은 흉터를 수없이 남겼다. 그 흉터들은 밤마다 내 속에서 곪아들었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되어가곤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달랐다. 욕설 대신 웃음이 있었고, 서로를 끌어내리기보다 손을 내미는 장면이 더 많았다. 그 따뜻함 속에서 나는 안도했고, 조금은 용기를 내어 다가가도 괜찮겠다고 믿게 되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이번엔 정말로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야.’ 나의 고요한 다짐은 봄 햇살처럼 내 마음을 데웠다.
수련회 전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불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상상했다. 이번에는 어떤 친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될까,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불 꺼진 밤에 속삭이는 이야기들은 어떤 색깔일까.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추억들이 이미 가슴을 두드리며 나를 들뜨게 했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내 곁에서 작고 반짝이는 등불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 등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내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지만, 그 밤의 고요는 이상하게도 고독이 아니라 희망에 가까웠다.
버스가 출발하던 아침, 창밖으로 나무들이 자기주장을 하는 사이로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과자를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고,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내 웃음은 아직 작고 서툴렀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도착한 숙소는 소박했으나, 그 소박함 속에 금세 친밀함이 싹텄다. 체육관에 모여 앉아 진행자의 농담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릴 때, 나도 자연스레 어깨를 흔들며 따라 웃었다. ‘내가 이 안에 있구나’ 그 깨달음은 오래도록 갈증 나 있던 목을 축여 주는 물처럼 시원했다.
밤이 되자 숙소는 잔잔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중학교 시절의 수련회는 그와 달랐다. 그때는 누군가 몰래 낙서를 하거나, 자는 아이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림을 덧칠하며 장남 삼아 즐거워했다. 나는 그 표적이 된 적도 있었고, 거울 앞에 서서 지워지지 않는 낙서를 보며 울상이 되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고등학생이 된 우리는 조금 더 성숙했고, 조금 더 너그러웠다. 그 밤에는 장난 대신 대화가 있었고, 괴롭힘 대신 웃음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웃어댔고, 나는 그것을 들으며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밤은 깊었고, 창문 너머로는 산자락의 어둠이 천천히 내려왔다. 바람이 나무를 스치며 작은 파도를 만들었고, 그 소리에 아이들은 점점 잠들어 갔다. 나는 잠든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평온할 수도 있구나.’ 외톨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자리에, 어느새 작은 빛 하나가 들어온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여행 가방을 풀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발바닥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엔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글씨가 남아 있었다. 볼펜으로 삐뚤빼뚤 쓰인 글귀 ‘잘 자~’라는 단순하고 짧은 문장이 내 마음을 크게 울렸다. 그것은 누군가의 가벼운 장난일 수도 있었고, 혹은 은근한 호의의 표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그 말이 마치 내 꿈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를 괴롭히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 것이다. 그 마음의 결은 가벼웠을지라도, 내게는 깊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글씨를 지우지 않고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엄마도 귀엽다며 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위안을 얻었다.
그 후로도 나는 자주 그 순간을 떠올린다. 외톨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던 내가, 잠든 사이 발바닥에 새겨진 한 줄의 말 덕분에 한동안은 외롭지 않았다. ‘잘 자~’ 그 말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이 나를 향해 내민 작은 손길, 누군가 나를 잠시라도 친구로 인정해 주었다는 증거였다. 사람은 거창한 위로보다도 이런 사소한 흔적 하나로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때때로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은 예전의 절망이 아니라, 내 삶의 질감을 깊게 만드는 빛과 그림자다. 그날 발바닥에 적힌 글씨처럼, 내 고독에도 작은 꽃이 피어난다. 그것은 나를 넘어, 누군가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외톨이의 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고독 속에서도 나는 잘 자라는 말을 듣듯, 언젠가 다시 새벽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