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줘로 위장한 삥
삥. 이 짧고 가벼운 소리 하나가, 중학교 매점 앞에서 일어나곤 했다. 점심시간만 되면 복도는 제비 떼처럼 몰려드는 아이들로 가득했고, 그 무리의 날갯짓은 매점으로 향했다. 도시락 반찬보다, 급식의 맛보다 매점의 달콤한 탄수화물과 음료 한 잔이 더 매혹적이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 틈새에 끼여 늘 종이컵 콜라 한 잔을 사 마시곤 했다.
그곳에는 늘 한 아이가 있었다.
“오백 원만, 나 좀 빌려줘.”
입에 달고 살던 그 말은 빌려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돌려줄 의지가 없는 징수에 가까웠다. 나는 오래 지켜봤다. 돈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아이의 눈동자 속을 고양이처럼 번뜩이게 만드는 컬러렌즈가 있었을까. 어디서나 짙은 화장품이 묻어있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분명, 필요에 의한 구걸이 아니었다. 행위 자체가 하나의 권력, 그 작은 폭력의 의식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을 피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오백 원을 내주었다. 누구는 귀찮아서, 누구는 그냥 별생각 없이, 그 무심한 동의가 그 아이의 작은 폭력을 허락해주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자판기 앞에서 동전을 구멍 안에 넣으려던 순간, 그 아이가 다가왔다.
“오백 원만, 배고픈데 돈이 없어.”
나는 순간, 그 애의 고양이 같은 눈빛과 마주쳤다. 섬뜩하리만큼 번쩍거리는 색. 무언가 잡아먹을 듯 집요한 시선. 나는 말없이 자판기에 돈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나 돈 없는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날 내가 가진 돈은 오직 종이컵 콜라 한 잔의 값뿐이었다.
“지금 누른 건.”
그 애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이게 다야. 나도 마실 건 마셔야 하잖아.”
나는 목을 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눈빛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며칠 뒤, 학교 근처 문방구에서 과자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오백 원만 주면 안 돼?”
이번엔 ‘빌려줄래’가 아니었다. ‘주면 안 돼?’라는 뻔뻔한 요구. 갚을 마음 따윈 애초에 없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아주머니께 딱 맞는 돈을 내밀었다. 거울처럼 시선을 비껴냈다. 그러자 또, “그럼 너 방금 산 거 두 개만 나한테 주면 안 돼?” 나는 속으로 똥 밟았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수업시간 되자 내 짝지 자리에 그 애가 앉아 있었다. 우리 반도 아닌데, 왜 굳이 내 옆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스케치북에 색연필을 움직였다. 그래도 그 눈빛은 느껴졌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림자 같은 시선.
“그림 잘 그리네. 그림 좋아해?”
“응.”
짧게 대답했지만, 질문은 이어졌다.
“넌 나 싫어하지? 왜 싫어해?”
나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정말로 모르는 걸까. 차마 ‘너는 남의 것을 함부로 탐하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다른 길을 냈다.
“내가 널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아니, 네가 조금 째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나는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 초등학교 때 별명 몰라? 빨간목도리도마뱀이야. 째려본다고 느낄 수 있지.”
사실 째려본다고 그런 게 아니라 겨울만 되면 빨간 목도리를 하고 다녀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지만, 회피하기는 좋은 변명거리였다.
그 애는 또 나를 찾아왔다. 미술도구를 안 가져왔으니 그림도구를 ‘빌려달라’는 명목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내 안에 있던 철벽이 잠시 느슨해졌다. 유치원보다 더 어린 시절부터 써오던, 수십 가지 색깔이 담긴 오래된 물감. 내 손때와 기억이 묻은 붓과 팔레트. 나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겼지만, 한 번쯤은 빌려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물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다른 반 친구에게 들었다. 쓰레기통에서 붓과 팔레트를 본 것 같았다고. 내가 확인했을 땐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때 깨달았다. 그 애는 결국 무언가를 가져갔다. 돈 몇 백 원이 아니라, 내가 아끼던 물건과 함께 내 마음의 한 조각을 가져가 멋대로 버려버린 것이다. 내 추억과 감정이 쓰레기통 속에서 무참히 버려지는 기분.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의 눈빛, 그때의 표정만은 잊을 수 없다. 집요하게 내 눈동자를 따라오던 고양이 같은 시선. 그 뒤에 숨어 있던 집착과 욕망. 그리고 끝내 내가 열어준 틈 사이로 스며들어,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 손길.
살다 보면 이런 일은 반복된다. 오백 원을 빌려달라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어느새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사람들. 말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남의 호의를 이용하는 손길. 그것은 단순한 어린 시절의 해프닝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내 마음에 철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쉽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내 물건, 내 감정, 내 추억을 지키기 위해. 그러나 그 벽은 나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나를 고립시켰다. 고독은 그렇게 함께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약한 마음을 노린다. 사기도, 착취도, 이용도, 모두 마음의 문틈이 열려 있을 때 들어온다. 철벽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빼앗긴다. 그러나 벽을 두르면 따뜻한 바람마저 막힌다.
그 아이는 단지 내 어린 시절의 ‘삥 뜯는 애’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억은 내게 더 큰 물음을 남겼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디까지 열고 어디까지 닫아야 하는가. 철벽을 치지 않으면 이용당하고, 철벽을 치면 고립되는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종이컵에 얼음을 채우던 자판기 소리가 들린다. 삥—. 눌러진 버튼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그 한순간. 세상은 언제나 오백 원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화장품으로, 누군가는 달콤한 말로, 누군가는 친밀감으로. 그리고 우리는 끝내 내 소중한 것들을 내어주고 나서야, 그것이 빼앗긴 것임을 깨닫는다.
고독은 어쩌면 그 빼앗김의 잔해 위에서 자라나는 나무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나무의 뿌리를 밟으며 걸었다. 누군가의 집착과 구걸과 폭력이 내게서 가져간 것들을 떠올리며.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끝까지 철벽을 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 철벽 안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고독의 행군은 그런 모순을 안고 나아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