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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가는대로 Nov 03. 2023

백수의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제균 일기

새벽을 열었던 열흘간의 하루 두 차례 경건한 의식

  06:00, Morning Call 소리에 눈을 떴다. 약 먹을 시간이라는 신호이다. 백수의 귀하고 한가로운 새벽잠을 방해하는 Morning Call이 무척 밉다. 손길을 주지 않은 주인을 향해 계속 울어대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엄지로 가볍게 어루만져 징징거림을 지웠다. ‘하상욱’의 시, ‘알람’에 나오는 “늘 고마운 당신인데 바보처럼 짜증 내요”라는 시구가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이제는 손가락이 아닌 몸을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대형 거울 앞 탁자 위에 있는 긴 약봉지 줄에서 가장 위에 있는 봉지 하나를 뜯어 책상 곁으로 다가가 쓰레기통을 책상 위에 올린 다음 가위로 내 이름이 인쇄된 부분을 가느다랗게 잘라 나의 흔적을 지워서 버렸다. 거실로 나가니 여명의 도움을 아직 받지 못한 어둠과 적막이 거실과 창밖을 모두 점령하고 있다. 부엌 전등 스위치 중 위에 있는 스위치만 눌러 정수기 쪽 조명만 밝혔다. ‘정수’ 버튼을 눌러 물을 250ml의 절반만 받고 이어서 ‘온수’ 버튼을 눌러 컵을 미지근한 물로 채웠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냉수’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 홀대받는 버튼이 되어버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게 만드는 뜨거운 태양을 영접할 때까지 이런 홀대는 계속될 것이다.


  약을 입에 넣어야 할 긴장된 순간이다. 조금이라도 입안에서 지체하면 쓰디쓴, 게다가 역겨운 항생제의 맛을 오래 견뎌야 해서 사격할 때 숨을 고르는 것보다 더 긴장된 마음으로 숨을 멈추고 목 안 악이복근(앞힘살)에 힘을 주어 목구멍을 막은 다음 손에 들린 세 종류, 여섯 알의 항생제와 PPI 한 알, 모두 일곱 개의 알약을 털어 넣고 바로 물을 들이켜 재빠르게 식도를 통해 위장으로 흘려보냈다. 잠시 후 위장에 도착한 이 항생제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발버둥 치게 하여 죽기를 바라면서. 믿음이 깊은 교인들의 새벽기도보다 더 숭고한 아침과 저녁 행사가 20회 중에서 8번째가 끝났다. 4년 전 첫 제균 치료할 때 직장 행사 때문에, 그리고 4일 동안 여덟 번이나 먹었으니 파일로리균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입에 술을 대면서 복용을 중단했던 과오는 다시 범하지 않으리라.


  30분 후에 먹어야 할 아침 식사를 위해 삶은 계란 한 개, 사과 한 개, 군고구마 한 개를 들고 안방 침대로 돌아와 비스듬하게 침대에 누워 TV를 켰다. 새벽을 여는 앵커와 기자들이 부지런하게 세상 소식을 물어다 알려준다. 이제는 언론 보도에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어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일이건만 아직도 뉴스에 눈길이 가는 것은 완전한 퇴직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잠시 후 아침을 먹으면서 혼자만의 새벽을 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조용한 이 시간에 혼자 먹는 아침이 무척 생소하다. 아침을 먹은 흔적은 모두 주방 싱크볼 안에 넣어두고 옥상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오늘도 목표량인 다섯 개비를 넘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을 먹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새벽 날씨가 제법 차갑다. 여명이 서서히 어둠을 밀어내고 천천히 세상을 점령 중이다. 컴퓨터를 켜고 이미 열었던 새벽을 이어가고 싶은데 쌀쌀한 기운이 나를 침대로 유혹한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 침대로 다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초패왕 항우가 유일하게 무겁다고 느꼈다는 그 눈꺼풀이다. TV를 끄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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