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점 다섯 가지
시간 참 빠르다. 그러니까 딱 10년 전, 2015년 5월에 조지타운 로스쿨을 졸업 후 2개월간 바 시험 준비를 하고, 8월부터 연방 법원에서 재판연구원 근무를 시작하며 내 법조인 경력이 시작됐는데, 벌써 햇수로 10년 차 변호사가 됐다. 그때만 해도 10년 차 변호사라고 하면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은, 거짓말 보태서 약간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막상 그 연차의 변호사가 돼보니 생각보다 별 볼일 없다. 어쨌든 그동안 느낀 점을 적어보려 한다.
1. 법은 무궁무진하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바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변호사로서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왠지 막 어떤 사건이 맡더라도 '훗 나의 뛰어난 법 지식과 현란한 논리로 어떤 사건이든 해결해 주겠어'라는 근자감이 생길 때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은 실무를 접하면서 처참하게 깨진다. 로스쿨/바 시험공부할 때만 해도 그렇게 단순 명쾌하게 만 느껴지던 법적 쟁점들이, 실무로 오면서 수십 년간 변호사 업무를 해온 베테랑들도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는 복잡한 내용들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솔직히 한 3년 차까지는 변호사라고 불리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실무 지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연차가 쌓이더라도 법 분야를 바꾸면, 그전의 실무 지식은 거의 무용지물이 된다. 물론 기본적인 법률 리서치나, 의뢰인 상대하는 법, 서면 작성하는 기본 스킬을 유효하겠지만, 해당 법 분야의 실무에서는 다시 초보 변호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만큼 법 분야는 광대하고, 실무로 들어가면 세부적인 내용이 정말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변호사들도 다른 변호사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업무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 생각에 변호사의 연차가 쌓이면서 생기는 경험과 노하우는, 결국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다. 즉, 일단 무엇을 모르는지 알면 적절한 질문과 리서치를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찾아갈 수 있는데,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계속 헛발질을 할 뿐이다.
2. 법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가깝다.
로스쿨 시절, 혹은 저년 차 변호사 시절만 해도 법은 수학 혹은 과학적 법칙처럼 정교한 기술적 도구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무를 경험할수록 결국 법은 예술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게,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고, 따르는 주체는 전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사람의 이해관계와 감정,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형사 변호사 시절, 다른 변호사들과 자주 하던 농담이 있다. "오늘 내 의뢰인의 운명은, 담당 판사가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에 달려있다" 조금 심한 비약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만큼 법이라는 도구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가정하고, 해결하는 데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적당한 자격을 갖춘 판사라는 존재(혹은 배심원)에게 우리의 법적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률가는 법 지식과 논리력을 기본으로 하지만, 결국 정말 중요한 스킬은 사람을 대하고, 예측하고, 다루는 스킬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AI가 변호사를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되는 것이 있다면, AI를 사용하는 변호사가 그렇지 않은 변호사를 대체할 뿐이다.
3. 사실 변호사도 잘 모른다.
위의 1과 2의 연장선인데, 법률 실무는 방대하고 인간이란 존재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변호사도 사실은 잘 모른다. 그냥 법 지식과, 비판적 사고능력, 유사한 사례를 많이 접해본 경험상 '왠지 이럴 것 같다'라고 합리적인 추측을 하는 게 전부다.
다른 분야를 봐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 어떤 의사들도 특정 치료방법이나 약의 효능을 100% 장담하지 못한다. 의학·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한들, 각 개인의 신체와 유전자는 전부 다르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있는 환자가 그 치료법이나 약에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는 정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쌓인 데이터와 실험 결과가 있으니 그냥 합리적으로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건, 선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형사 사건으로 기소되거나, 이혼 소송을 당하는 일은 일반으로서는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일이지만, 변호사로서는 일상적으로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적절한(하지만 제한된) 조언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변호사들도 모든 법과 모든 실무, 모든 사례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4. 대다수의 변호사는 불행하다.
그만큼 변호사는 세상의 불확실성을 다루는 존재지만, 의뢰인들이 변호사에게 가지는 기대감은 그보다 훨씬 높고 사회는 변호사들에게 많은 역할을 요구한다. 어느 직역이나 그렇겠지만, 특히 한 사회에서 법률가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 자본과 비용이 들어가고, 일단 유능한 변호사가 탄생하면 사회는 그 변호사에게 투자한 만큼 본전을 뽑아내는(?) 구조가 잘 형성되어 있다.
높은 엘샛 점수를 받아 탑 로스쿨에 진학하고, 졸업 후 명망 있는 대형 로펌에 취업을 하더라도 결국 그 안에서 파트너십을 위한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파트너가 되더라도 의뢰인 수임을 위한 경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적당한" 로스쿨 들어가서, "적당한" 삶을 사는 것도 쉽지 않다. 법률 시장의 급여는 이봉 분포(bimodal bell curve)를 그리기 때문에, 대형 로펌에서 아주 좋은 급여를 받던가 아니면 그저 그런 직장에서 웬만한 비법률가보다 적은 급여를 받던가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형 로펌 변호사의 삶은 TV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지 않다. 그들이 가끔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파인 다이닝이나 해외여행 사진은 그들이 실제로 보내는 시간의 극히 일부를 보여주는 스냅샷일 뿐이다. 게다가 그들이 미쉘링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해외여행을 하는 동안 파트너의 이메일에 시시각각으로 답변을 하며 멋진 음식과 여행지를 즐길 겨를도 별로 없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측은함이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돈을 적게 받는 변호사들은 그만큼 적게 일하니까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하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왜냐면 법 실무에는 완벽이라든지, 끝이라는 게 도무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당" 1000불을 청구할 수 있는 대형 로펌 변호사나, "사건 하나"에 1000불을 받는 음주운전 사건을 대리하는 변호사나 그 스트레스 강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는 없다.
사실 위에서는 약간 부정적으로 써 놓은 것 같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모든 사례는 케바케이고, 개인의 적성과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영어로 하자면 YMMV. 변호사의 업무와 근무 형태, 의뢰인에 따라 내가 말한 내용들이 전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 고민, 번뇌를 거듭하여 여기까지 왔지만, 나도 아직 완벽하게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사실 정답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길을 선택했을 거라는 점. 최소한 나한테는 이 길이 적성에 맞고,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조언을 해주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실수가 그러하듯이, 한 명의 성공 혹은 실패 사례가 꼭 다른 사람에게 타산지석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냥 하나의 데이터 포인트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겨우 10년 해놓고 벌써 평생 변호사 한 것처럼 써놓긴 했지만, 이건 나름 블로그에 남기는 기록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별 개념치 않을 예정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예전 기록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면 분명 이불킥을 할만한 오글거리는 내용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 내 생각과 경험을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어떤 삶과 행보를 걸어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변호사 20년 차에는 어떤 글을 쓰게 될 것인가?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