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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데헌이 주는 의미(약 스포일러 포함)

무엇이 케데헌을 앓게 하는가?

by 김정균 미국변호사
Minhwa-Tiger_and_magpie-02.jpg 케데헌의 마스코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미국에 이민 온 지 10년이 넘은 1세대 교포로서 처음 넷플릭스에 케이팝 데몬 헌터(줄여서 "케데헌")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약간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뿐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큰 기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이건 그냥 케이팝의 인기에 편승해 보려는 그저 그런 B급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케데헌이 미국 및 다른 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냥 케이팝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혹은 그냥 화려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즐겨보기 때문에 반짝 뜬,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평생 한국 노래를 듣고 살아온 나에게, 이 영화는 뭔가 나 같은 사람을 대놓고 취향 저격(?)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아서, 오히려 반항심이 들어 영화를 보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트레이더 조 같은 미국 그로서리에서 새로운 맛 김치를 출시했는데, 이게 미국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는 기분? ㅋㅋㅋ


내 와이프도 마찬가진데, 미국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낸 와이프는 오히려 그러한 반감이 더 심했다. 뭔가 오글거리고 유치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와이프의 직장 동료들은 케데헌에 열광하고 있었는데, 와이프도 이를 억지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넷플릭스에서 볼게 없어진 우리 부부는, 주말에 어쩔 수 없이(?) 케데헌을 보기로 했다. 케데헌이 넷플릭스에 뜬 지 거의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난 시기였다.


결론은? 케데헌을 일찍 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단순히 어린이용 케이팝 영화가 아니라, 어른들에게 깊은 메시지와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물론 영화의 퀄리티나 음악의 수준은 말한 것도 없었다.


그제야 이 영화가 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지 알게 됐다. 이것은 단순히 케이팝 음악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self-acceptance에 관한 교훈이었다. 누구나 남에게 드러내거나 인정하기 싫어하는, 부끄러워하는 나의 모습, 나의 결점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하나의 성장 드라마였다.


나에게도 루미의 문양과 같은 숨기고 싶은 결점이 있었다. 바로 영어. 그렇다.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10년 차 변호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어민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내가 로스쿨 시절이나 혹은 취업 과정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은 내 모자란 영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발음이 조금 더 원어민스러웠으면, 내 문장이 조금 더 유려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때는 원어민처럼 발음하고 싶어서 매일 큰 소리로 신문을 읽는 연습을 하거나, 발음 교정에 관한 교재를 공부하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할 때는, 항상 내가 비원어민인 게 밝혀질까 봐 매우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고, 발음도 매우 신경 쓰며, 소위 안전한 표현만 사용하다 보니 저절로 말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왠지 내가 발음이나 말실수를 하면 상대방이 '이 사람은 변호산데, 영어를 잘 못하는구나, 혹시 사기꾼은 아닌가?'라고 평가할 것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말 그대로 케데헌에서 셀린이 했던 "our faults and fears must never be seen"이란 말을 성실하게 수행 중이었다.


사실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떨칠 있게 된 건, 연방정부에 취직한 이후였다. 변호사로서의 내 능력을 활용해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직장 상사와 동료로부터 내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소위 내가 "1인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나서부터였다.


물론 우리 와이프의 역할도 컸다. 우리 와이프는 항상 내가 원어민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멋진 변호사라는 빈말(?)을 끊임없이 해준다. 처음엔 그 말을 속으로 부정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그 말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마 거의 10년 동안 그 말을 듣다 보니 세뇌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케데헌 덕분에 나는 나의 모자란 영어 실력과 코리안 엑센트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영어 단어를 잘못 발음하거나 문자 할 때 문법을 틀리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틀리면 그 자체가 나인 것이다. (물론 업무 할 때는 법률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최대한 옳은 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자랑스럽게 내가 한국인 이민 1세라는 점과 영어가 second language라는 점을 밝힐 수 있다. 더 나아가 내가 케이팝 팬이라는 점과, 케데헌 앓이를 하고 있는 40대 유부남이라는 점도 밝힐 수 있다. (심지어 나는 다음 주에 있을 영화관 sing along을 토요일, 일요일 모두 예약해 놨다. 내 평생 sing along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된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중에 아직 케데헌을 보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그 편견을 극복해 보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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