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이미 내 인생에서 여러모로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한 해가 될 것 같다. 좋은 쪽 이유 중 하나는 10월에 있었던 하와이 여행.
배경
양가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는 관계로, 우리 부부는 매년 10월에 2~3주간 한국을 방문하곤 했다. 대체로 미국 공휴일인 콜럼버스 데이(혹은 지역에 따라 원주민의 날)를 껴서 연차를 하루라도 아꼈다. 왜 10월이냐 하면, 둘 다 연방정부 컨트랙에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와이프는 컨트랙터, 나는 정부 쪽) 회계연도가 끝나는 9월이 가장 바쁘고, 10월에는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 한국의 추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여행이나 교통편 마련이 쉬운 편이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개천절과 한글날이 추석 연휴와 이어지면서 거의 일주일이나 되는 역사적으로 긴 연휴가 생겼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께 미국과 한국의 중간 지점인 하와이에서 만나 휴가를 보내는 건 어떻냐고 제안을 했고,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바다를 좋아하는 와이프는 당연히 대찬성.
하와이행이 확정된 7월부터 와이프는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부모님께서는 하와이행 비행기를 찾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대한항공은 이미 표가 없어서 에어 프레미아에서 간신히 레드아이(밤 비행기) 티켓을 구하실 수 있었다.
일정
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일 때문에 4일 출국~10일 출발(11일 입국)의 일정을 따를 수밖에 없으셨다. 우리 부부는 그나마 여유가 있어서, 10월 1일~11일 동안 하와이에 머무를 수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 없이 우리 부부만 오붓하게 하와이를 며칠이라도 즐길 수 있게 한 점도 고려했다. 사실 일정을 짤 때는 별생각 없이 10월 1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부 셧다운 타이밍에 맞춘 셈이 됐다. 공교롭게도 우리 기관은 여유 재정이 조금 있어서 잠시나마 셧다운을 피해 갈 수 있었기에 만약 연차를 쓰지 않았더라도 정상적으로 출근했겠지만, 일단 셧다운의 어수선함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인상 - 하와이 vs. 괌
우리 부부는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김에 부모님을 모시고 괌에 다녀왔다. 괌 여행도 꽤나 즐거웠기에 우리는 하와이는 괌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은연중에 있었고, 그 기대는 확실하게 충족됐다. 하와이는 괌보다 모든 면에서 (비행시간만 빼고) 더 나았다. 날씨는 물론, 시설, 볼거리, 음식, 쇼핑 등 모든 면에서 하와이가 양과 질로 괌을 압도했다.
사람
하와이는 미국 내에서 드물게 아시아계가 백인보다 많은 곳이며, 심지어 관광객들의 구성도 대부분 아시아계(특히 일본 및 한국)가 대다수라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유명 관광명소의 경우에는 어디에서나 일본어와 한국어가 들려와서 조금 과장하면 '이곳이 한국 혹은 일본이 아닌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일본인 관광객들이야 세계 어디서나 질서정연하고 예의 바르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라 크게 놀랍지 않았지만, 한국인 관광객들도 대부분 젊은 커플들이 많아서 그런지 민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미국 본토에서 온듯한 (이미 악명 높은) 미국인 관광객 중에 일부가 그러했다.
관광지는 말할 것도 없고, 관광객이 자주 방문하지 않은 다른 지역도 갔을 때도 사람들은 전부 친절하고 따뜻했다. 미국에서 생활한지 13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이라면 미국 땅에서 현지인과 융화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정치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DMV 지역이라는 점도 한몫한다)
관광명소
직업상 스스로를 라이트 한 밀덕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나는 하와이를 방문하게 되면 진주만을 꼭 가보고 싶었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 진주만(2001) 영화를 보고 갔다. 진주만과 USS 애리조나 기념관을 방문했는데, 참 뜻깊은 경험이었다. 어떻게 보면 911처럼, 미국인들에겐 뼈아픈 기억임에도 후손들이 이를 잊지 않도록 기록을 잘 보존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전쟁과 인연이 깊은 USS 미주리에도 승선해 볼 수 있었는데, 2차 세계 대전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USS 애리조나와 USS 미주리가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USS 애리조나 기념관 페리를 타고 오가면서 멀리 줄지어 정박 중인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을 여러대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 위상이 대단했다.
그 외에는 일반적으로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폴리네이시안 문화체험, 쿠알루아 랜치 방문, 여러 쇼핑센터 방문 등을 했는데, 전부 다 만족했다. 특히 문화체험을 통해 하와이 인근의 다른 7개의 서로 다른 원주민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음식
하와이 음식은 내 입에 아주 잘 맞았다. 원래 해산물과 고기, 일식을 즐기는 나로서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일식은 DMV지역의 웬만한 일식집보다 맛있었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일본식 비프까스(!)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 외에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맞춰서 간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도 만족했고, 길거리에서 사 먹은 아사이볼도 꽤 먹을만했다. 우리 부부는 토미 바하마에서 먹은 저녁이 가장 기억이 남았다.
쇼핑
관광 중에서는 역시 쇼핑이 빠질 수 없다. 부모님이 계실 때는 와이키키 쉐라톤에서 머물렀는데,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휘황찬란한 쇼핑 디스트릭트가 펼쳐져 있어서 거의 매일 저녁 산책 겸 쇼핑을 다녔던 것 같다. 다양한 명품은 물론, 하와이 토속 기념품도 곳곳에서 살 수 있었다. 게다가 하와이는 판매세(sales tax)가 4.712%로 내가 거주하고 있는 북부 버지니아의 6%보다 저렴해서 명품 쇼핑을 해도 세금을 적게 낼 수 있었다. (어차피 명품을 구매하면서 세금 운운하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것으로 구매를 합리화할 수 있긴 하다) 나도 덕분에 하와이 여행과 (곧 있을)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와이프에게 허락받고 시계를 하나 구매했다.
해변 및 바다
하와이는 무엇보다 해변과 바다로 유명하다. 10월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화씨 75도(섭씨 23도)~85도(섭씨 29도)를 크게 넘어서지 않아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도 수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서 바다에서 수영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덕분에 본인이 전생에 수달이었다고 믿고 있는 우리 와이프는 물속에서 배영으로 둥둥 떠다니며 수 시간 동안 물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바다거북을 목격하기도 했다. 파도도 적당히 있어서 파도타기에 최적의 장소였겠지만, 우리 부부는 겁이 많아서 파도타기는 시도해 보지 못했다. 다음에 또 간다면 한 번 배워보고 싶긴 하다. 그 무엇보다 바다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은 새벽에 일어났을 때 창밖에서 달빛이 바다를 비추고 있는 광경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본 자연 광경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결론
하와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번이 마지막 하와이 여행은 아니라는 것.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 그것이 여행이든 취업이든. 하와이에서는 단기든 장기든 한 번쯤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관광객으로 여행하는 것과 실제로 일하며 거주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 현실적인 어려움이 얼마나 하와이에 대한 환상을 얼마나 상쇄시킬 것인가.
예전에 어렸을 적, 미국 여행을 하면서 '언젠가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실제로 이뤘다. 하와이도 마찬가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하와이의 달빛을 보며 일어나고 바다 위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퇴근하는 삶을 해보고 싶다. 만약 하와이에서 살지 못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다른 섬들은 다 방문해 보고 싶다. 하와이는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다.
하와이에서 찍은 가족 사진과 새벽의 달빛 사진으로 포스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