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와 변호사
학창 시절 디아블로라는 게임을 엄청 열심히 하곤 했었다. 당시 고2~고3이었으니 아마 내 성적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11시에 야자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가 깎아주신 과일 먹으며 한두 시간 게임하고 자는 게 유일한 낙이었으니 말이다.
디아블로라는 게임은 자신이 캐릭터가 된다. 초반에 캐릭터를 생성할 때 직업과 이름을 정하면 그 직업에 맞는 기본 스킬이 있는데, 레벨업을 하면서 성장하며 스킬의 개수를 늘리기도 하고 가지고 있는 스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한편, 모험을 진행하면서 여러 가지 도전 과업을 달성하며 몬스터를 사냥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이템을 얻기도 한다.
당연히 처음 시작하면 캐릭터는 거의 거지 행색이다. 옷이나 제대로 된 방어구도 없고, 돈도 없어서 마을 상점에서 파는 고가의 마법 장비들은 그림의 떡이다. 스킬도 별로 없고, 체력도 약해서 마을을 벗어나면 나보다 작은 몬스터로부터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다. 처량하기가 그지없다. 어쩌다 해골이나 좀비 같은 약한 몬스터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끝에 돈 몇 푼이나 고철 무기라도 떨어지면 꼭 주워서 살림에 보탠다.
반면, 고렙들을 보면 일단 포스부터가 다르다. 등장부터 번쩍거리는 마법 장비와 화려한 스킬을 몸에 휘감고 다닌다. 전장에 나가면 이는 약과다. 어찌나 빨리 뛰어다니는지 따라잡기도 힘들고 심지어는 마법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순간이동을 쓰기도 한다. 고렙들이 사냥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상대방의 옷깃도 만져보지 못하고 사망한 몬스터들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그들이 흘린 마법 아이템과 돈이 강을 이룬다. 이런 고렙 플레이어들을 보면 '나는 언제 저렇게 될 수가 있을까? 나도 빨리 저들처럼 레벨 업해서 강해지고 좋은 아이템들도 차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도 고렙이 되었다. 그때 느낀 건 성취감보다도 허무함이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허무감. 게다가 몬스터들도 이제 시시하다. 내 캐릭터는 이미 충분히 강해져서 죽을 걱정이 전혀 없었고,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사냥터를 휩쓸고 다닐 수 있었다. 스킬을 충분히 쌓았고, 좋은 아이템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고렙을 넘어서 "고인 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고렙이 되면 게임이 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위치에 올라가 보니 큰 재미는 없었고, 오히려 지루함이 더해졌다.
그래서 과감히 고렙 캐릭터를 접고 새로운 캐릭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제야 게임의 재미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약 살 돈이 없어서 열심히 마을과 사냥터를 번갈아가며 맨발로 뛰어다니면서도 조금씩 돈이 쌓이고 성장하는 재미가 바로 게임의 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찮은 아이템이라도 열심히 모아다가 팔면 나중에 더 좋은 아이템을 살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지금은 약하더라도 언젠간 강해질 거라는 희망과 꿈이 있었다.
변호사 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졸업 한지 4년이 넘어 벌써 5년 차 변호사이지만 요새 들어 느끼는 점은 일을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점이다. 만렙 99인 캐릭터로 따지면 이제 한 15 렙 되었으려나? 뭔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점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 업무 특성상 거의 매일 법원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만렙 변호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만렙들도 저마다 격차가 있겠지만 사실 나 같은 쪼렙이 알 수 있을만한 차이는 아니다.
그때마다 디아블로 초보였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 나는 언제 저 사람들처럼 능수능란하게 의뢰인을 휘어잡고, 판검사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신들린듯한 변론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고렙을 부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게다가 나는 기껏해야 법원에 출석해서 기껏 두세 건을 힘겹게 동시에 처리할 뿐인데, 고렙 변호사들은 이보다 훨씬 많은 사건을 정신없이 법정을 옮겨 다니며 전부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우선 '나는 언제쯤 저렇게 많은 의뢰인이 생길까'라는 생각과 '언제쯤 저렇게 효율적/효과적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 예전에 게임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지금이 가장 즐거운 때라는 것을 되뇌게 된다. 어쩌다 돌고 돌아서 수임하게 된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했을 때, 잘못된 판단으로 의뢰인을 난감한 상황에 빠뜨리게 되었을 때, 종종 법정기일을 놓치는 악몽을 꾸고 땀에 젖은 시트에서 잠을 깰 때 등,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의 조각들이 결국은 내가 초보 게이머 시절 열심히 주워 담은 하찮은 아이템들이 아닐까?
현실과의 차이점이라면, 게임의 캐릭터는 죽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마을에서 부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하드코어" 모드라고 해서 캐릭터가 한 번 죽으면 영원히 그 캐릭터를 다시 플레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는데, 사실 난 딱 한 번 해보고 아끼던 캐릭터가 죽어서 크게 상심하여 다시는 하드코어 모드를 플레이하지 않았었다. 인생도 "하드코어"인 것 같다. 어차피 그 어떤 일이든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일반 플레이보다 하드코어가 더 재밌다. 그만큼 긴장과 스릴이 있다. 게다가 캐릭터가 조금씩 강해지는 성장의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 재미는 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