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이라 욕해도 좋다!
* 이 글은 영화의 개봉당시 2008년 10월 작성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새로 쓰거나 수정을 하려다가 당시의 첫 느낌을 그대로 다시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부끄럽지만 그대로 옮깁니다. 다시 보니 고쳐써야 할 습관들이 여럿 보이네요.
개봉 전 부터 제법 화제가 되었던 <미쓰 홍당무>를 오늘 드디어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는지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다시피, 박찬욱 감독 제작작품이라는 점 때문이었죠. 일반관객들에게는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작품이다라는 걸 마케팅 측면에서 강조하여 홍보하고(전 근데 아직도 박찬욱 감독이 대중적인 홍보 포인트가 된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집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흥행 실패한 이유는 관객들이 박찬욱이라는 감독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전혀 달랐음으로 벌어진 현상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올드보이>보다는 더 박찬욱스럽다고 생각되는데, <올드보이>의 엄청난 성공이 그를 너무 대중적인 감독으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도록 만든것이 아닌가 싶거든요 ㅎ),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역시 박찬욱 감독이긴 하지만 그 이름 자체가 아니라, 박찬욱 감독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비밀병기를 드디어 꺼낸다는, 신인 이경미 감독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목을 받았던 영화였죠.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아주 큰 기대를 가졌었다가 막상 포스터 등이 공개되던 시점에서는 그저 그런 코미디인가 보다, 즉 안면 홍조증이 주가 되는 코미디인가 보다 해서 살짝 기대를 접었었는데, 이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안면 홍조증은 마치 주인공이 안경을 썼다 안썼다 정도의 차이일뿐 그저 캐릭터를 소개하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더군요. <미쓰 홍당무>는 정말 오랜만에 대한민국에서 만나는 캐릭터가 빛나는 영화이며, 마치 우디 알랜의 영화처럼 수다에서 오는 재미도 느낄 수 있고,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슬랩스틱 코미디서부터 결국엔 유쾌한 웃음과 씁쓸한 웃음마저 동시에 느껴지는 보석과도 같은 2008년 한국영화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공효진의 인상적인 표정으로 떡하니 채워져있는 포스터가 인상적인 <미쓰 홍당무>는 정말 리얼한 캐릭터 영화입니다. 일단 공효진이 연기한 주인공 '양미숙'의 캐릭터는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이자, 오랫동안 기다렸던 본격적인 캐릭터랄까요. 안면 홍조증으로 인해 시도때도 없이 붉게 변하는 얼굴 빛을 재쳐두더라도, 그녀의 다양한 표정연기와 표정연기에 가려 도드라지진 않지만 몸을 쓰는 연기에서도 '양미숙'이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그 자체로 독보적인 존재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미숙'은 캐릭터 영화의 주인공 답게 마치 히어로 영화의 히어로처럼 의상도 거의 저 회색 코트의 단벌로 등장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양미숙'이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그녀의 대사에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연상 시킬 만큼 (실제로 이경미 감독은 우디 앨런의 영화와 찰리 채플린의 영화 같은 분위기를 염두에 두었었다고 합니다), 속사포 같은 대사들과 굉장히 잡다한 대사들이 가득한데,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다'라는 것의 미덕은 단순히 그 양이 많아서 좋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 쓸때 없어 보이는 많은 말들 가운데 (나름) 논리적인 바탕이 깔려있어야 하는데 '양미숙'의 말들을 듣다보면 굉장히 많은 말들을 하고 또 반복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철저히 양미숙 만의 논리적인 바탕을 깔고 있는 대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좋았던 건 바로 그 '잡다함' 때문이었는데, 보통 일반적인 캐릭터의 대사에서는 좀 더 일반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기 위해 생략하고 절제했던 말들을 최대한 짜르지 않고 확장한 듯한 대사라고 할까요. 시시콜콜 구차한 것을 다 들먹여가며 남들은 신경쓰던 안쓰던 자신만의 이야기를 끝내고야 마는 대사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가장 큰 공은 공효진씨의 맛깔스런 대사 연기에 있다 해야겠죠.
'양미숙'만으로도 괜찮은 캐릭터 영화가 됐을 법한 <미쓰 홍당무>에는 이 외에도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들이 몇몇 더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캐릭터는 신인 배우 서우가 연기한 '서종희'라는 인물입니다. 극중 이종혁이 연기한 서종철의 딸로 등장하는데, 기존 한국영화에서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학생 캐릭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아우라를 선보입니다(교복입은 학생의 대부분은 침 뱉는 불량 학생 아니면 뭔가 사연있는 예쁜 학생이었죠. 아, <좋지 아니한가>에서 황보라가 연기한 캐릭터는 열외로 해야겠군요. 하지만 이 경우는 학교 보다는 집이 주배경이 된 영화였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군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신인배우 서우의 경우 기존에 몇몇 CF를 통해 코믹함과 세련된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던 배우였는데, 일단은 이렇게 키가 작은 배우인지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극중 공효진과 키 차이가 정말 학생과 선생님처럼 나는걸 보고는 처음엔 일종의 카메라 페이크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풀샷을 보니 아니더라구요), CF 속에서의 진한 화장을 한 모습만 보았던터라 이렇게 화장기 하나 없고 오히려 주근깨와 다크써클까지 있는 얼굴을 보니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런 영화에서 이런 요상한 캐릭터는 그냥 요상함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서우가 연기한 '서종희' 캐릭터는 '양미숙' 못지 않게 매력적인 캐릭터로서 신인배우 서우의 연기력도 엿볼 수 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했던것 처럼 CF속의 그 인물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중학생스러운 그 표정들, 그리고 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여배우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완전히 표정연기함에 있어 '놔버린' 그 연기가 가장 인상에 남았습니다.
신인배우인 서우의 얘기가 나온 김에 이 영화를 통해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또 한명의 신인배우 황우슬혜의 대한 얘기도 마저하고 넘어가야 겠네요. 극중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역할을 맡은 황우슬혜 역시 강한 캐릭터가 버티고 있는 이 영화에서 빛을 잃지 않는 열연을 펼치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어디서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 내숭 가득한 '이유리'역할을 소화하기에 그녀의 청순한 마스크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외에 상당히 순수함을 넘어서 어리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밉지만은 않게 표현된 것은 아마도 그녀의 모습과 연기가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사실 이 영화가 단순 코미디가 아닐까 하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씁쓸한 웃음이 동시에 드는 코미디 영화더군요. 일단 영화는 이른바 '왕따'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안면 홍조증으로 주목받고 주변인들에게 비호감으로 낙인아닌 낙인이 찍혀 학생 시절이나 선생님이 된 지금이나 따돌림을 당하는 양미숙의 캐릭터를 그리는 태도나 주변인들의 시선을 그리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루저나 왕따(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요)가 주인공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즉 루저는 끊임 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 되고, 왕따는 우여곡절 끝에 모든 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이런 전개는 신파극 중의 신파극 보다도 뻔하다고 느껴지기에 별다른 흥미나 재미도 느끼지 못하고, 더나아가 교훈적인 면에서는 더더욱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인지 <미쓰 홍당무>에서 이들을 그리는 방식은 참 마음에 들더군요.
사실 본래 이 리뷰의 제목도 보통 같으면 '궁상이라 욕하지 마라'라고 했겠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전달하는 면에서 접근했을 때는 지금처럼 '궁상이라 욕해도 좋다'가 더 맞다고 생각되더군요.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양미숙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하나도 이루어지지도 않고 피부과를 다녔지만 안면 홍조증이 결국 낫는 것도 아니죠.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결국 자신과 비슷한 동료 한 명을 더 얻은 것 외에는 이렇다할 긍정적 변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서종희' 역시 축제 무대에 올라 공연까지 마쳤지만 그렇다고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갑자기 '절친'이 됐을리는 만무하고 계속 찐따나 찐따 애인으로 놀림거리가 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합니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포스터에 있는 '내가 뭐 어때서?!'라는 문구처럼 루저인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네들의 방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내가 뭐 어때서?!'라면서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끝까지 편견과 오해와 싸워가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외롭게 지내왔을 그들이 왜 사랑받고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느냐만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지지 않겠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라는 식의 오기가 발동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영화가 씁쓸했던 건 결국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사회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감독은 의도적으로 외모나 편견들만으로 사회가 소수를 왕따시키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여러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집요하게 이들을 무시하는 학생들의 대사라던가, 본인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찐따와 찐따애인'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서 신청해 놓고는, 시간내에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계속 방송으로 이들을 비꼬듯 반복하는 장면에서는, 이들을 왕따로 만든 다수의 악마적 횡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단체로 리본 달고 춤을 췄던 여학생들의 미소 띤 얼굴들이 결코 예뻐보이지 않았던 것 또한 이런 면에서 가능한 연출이었죠.
개인적으로 극중 양미숙+서종희와 이유리가 채팅을 하는 장면에서는 <클로저>도 그렇고,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역시 이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건 러시아어를 이용한 개그였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참 단순하지만 그 발음 때문에 웃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 영화가 별 세 개 정도에서 별 네 개를 넘어 다섯에 가까운 영화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로 그 '청각 자료실(?)'에서 벌어지는 시퀀스 때문이었습니다. 극 중 주요 모든 인물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거침없이 의견교환을 나누는 이 시퀀스는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시나리오를 맡은 작품이기 때문에 그의 전작인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폐교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이 시퀀스는 정말 대박이더군요. 이 공간만의 특성을 제대로 이용한 소소한 유머도 그렇고, 마치 법정에 선듯 서로가 서로를 변호하고 주장하는 이 장면은 마치 최근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비몽>에서 갈대밭 씬이 그랬던 것처럼, 단 한 장면에 굉장한 에너지가 담겨있는 멋진 장면이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특히 이 장면이 더욱 그럴듯 하고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데에는 종철의 아내 역할을 맡은 방은진씨의 포스가 크게 작용한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구요. 방은진씨가 묵직하게 무게를 잡고 있던 탓에 이 장면이 왠지 모르게 이상한 아우라를 갖게 된 부분도 분명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미쓰 홍당무>는 이 시퀀스 하나 만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올해의 한국영화다' '상반기에 <추격자>가 있었다면 후반기엔 단연코 <미쓰 홍당무>다' 라던지,'박찬욱 감독이 밀어주는 신인 감독은 역시 다르다' 등등의 표현들에는 거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느 영화나 그렇겠지만 개봉 전 홍보 때는 다들 조금씩 과하게 부풀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미쓰 홍당무>도 너무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거대 포장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이런 표현들이 결코 크게 과장된 것 만은 아니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공효진을 비롯해 신인배우 서우와 황우슬혜, 그리고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보여준 방은진씨, 그리고 리뷰에도 거의 노출이 되지 않아 살짝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 이종혁씨 등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도 볼만하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캐릭터 영화이자 코미디이며, 그 안에 쓸씁한 뒷 맛과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까지 넣어놓은 훌륭한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분명 마이너한 코드와 개성적인 분위기가 가득담긴 영화라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시종일관 집중할 수 없고 불편하게까지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 코드에 맞는 이들이라면 보는 내내 킥킥 거리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독특한 개성만큼 엄청난 흥행까지는 거두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개성 강한 영화가 좀 더 한국영화계에서대접받을 수 있는 케이스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