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기억에 남을 '마음'
모든 일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글 쓰는 일도 마찬가진데 어떤 영화에 대한 글은 극장을 나오며 머릿속에서부터 시작돼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기까지 마치 누가 써주는 것처럼 술술 풀리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너무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말들도 넘쳐나는데 무슨 일인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아 끙끙 데며 써지지 않거나, 결국 아예 쓰지 못하게 된 경우도 많다. 좋아하는 영화일수록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 경우는 대표적으로 '결혼이야기'를 들 수 있겠다. 몇 년째 시도만 하고 못 쓰고 있다. 보통 이렇게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 영화들은 결국 '결혼이야기'처럼 너무 좋아하는 영화임에도 글로 남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쉽사리 정리가 안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들지만, 사실은 적당한 타이밍을 놓쳐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룩 백 (Look Back, 2024)'도 그럴 뻔했다. 거의 근접했었다. 벌써 일주일 넘게 이런저런 글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 결국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6학년이 된 후지노처럼 '룩 백'에 관한 글은 쓰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리가 잘 안 됨에도 '룩 백'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쓰고 싶은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작품이 너무 좋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보게 끔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도 물론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끝날지도 모르는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룩 백'이 너무 가슴 깊이 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체인소맨'의 작가로 유명한 후지모토 타츠키가 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던 '룩 백'. 사실 '체인소맨'은 애니메이션이나 코믹스 초반은 아주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지만, 코믹스는 어느 순간 선을 좀 넘기 시작하면서 근래 발간된 17권에 이르기까지 점점 산으로 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포스터와 예고편 등을 통한 정보들은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만화를 좋아한 두 소녀가 서로 만화와 함께 성장하는 조금은 평범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일 거라 예상됐는데, '룩백'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작품이었다.
원작 '룩 백'은 작가인 후지모토가 '만화 그리는 게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본질적 질문을 맞닥뜨렸을 때 겪었던 무력함과 이를 이겨냈던 경험 등을 통해 스스로와 만화가 동료들을 위로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원작 코믹스는 물론이고 오시야마 키요타카가 연출한 애니메이션은 단지 만화가들을 위한 작품만은 아니다. 만화가를 비롯해, 음악, 미술 등의 예술가들은 종종 비슷한 질문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내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일이 자기만족 외에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꼭 주변 사람들의 핀잔만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나는 과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나?'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반드시 예술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의 무력함이나 무용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 경우 특별히 더 '쓸데없는' 것들을 판매하는 걸 생업으로 하고 있다 보니 자주 자문하게 된다. 더불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부담과 강요를 받아가며 이어나가고 있는 영화나 스스로의 관한 글쓰기도 그렇다. '과연 누가 읽기는 할까?'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깊어져 관둬야겠다 마음먹을 때도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마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영화 글 쓰시는 거 항상 잘 보고 있어요' '브런치 잘 읽고 있어요'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받곤 한다. 딱 포기하려 할 때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주기를 반복하다 보니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닿는구나'라는 희망으로 계속해 나가기보다는, '설령 아무에게 닿지 않는다 해도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나아가자고. 외롭더라도 그 편이 더 오래 나아갈 수 있다는 결론에서다. 그렇게 묵묵히 나아가다 보면 보너스처럼 누군가에게 닿아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도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거다.
다시 '룩 백'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룩 백'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외롭게 책상 위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창작의 등을 주목하는 이야기다. 보통 만화가가 주인공인 이야기라면 역동적으로 펜을 빠르게 움직이며 페이지를 그려내는 장면을 비중 있게 그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 책상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자주, 또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등 뒤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어쩌면 서로 마주 보고 나아가는 것보다 더 강한 결속력을 갖는 후지노와 쿄모토 사이 연대의 고리를 주목한다.
더불어 '룩 백'은 누군가를 잃은 이들을 고요히 위로하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는 하나의 사건이 등장하고 그 순간부터 조금은 판타지적 설정이 개입한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건 이질적일 수 있는 설정의 개입이 아주 자연스럽고 또 만화라는 주제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같은 질감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자칫 여기서 그간 쌓아왔던 공감대가 조금은 허무하게 연결될 수도 있었을 텐데, '룩 백'은 오히려 그 지점으로부터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그리고 상실이라는 정서를 섣불리 다루지 않는 엔딩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극복을 강요하지도 위로가 돋보이지도 않는 이 영화의 태도는,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