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호 '호텔 앤 레스토랑' 매거진 기고문
1950년대부터 수차례의 재개발 계획이 무산돼 낙후된 철도 기지였던 뉴욕의 허드슨 야드(Hudson Yards)가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맨해튼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로 불리는 대규모 재개발 사업으로 이곳은 상업, 문화, 교육, 주거 기능을 충족시키는 대규모 복합단지로 탈바꿈 중이다. 서로 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건물들은 각자의 특색과 용도에 맞게 다양한 디자인과 높이의 모습이지만, 이 지역의 브랜딩 계획에 맞춰 큰 틀에서 서로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허드슨 야드의 중심에는 뉴욕의 풍경을 담고 있는 록웰 그룹(Rockwell Group)이 설계한 전망대 레스토랑 피크(Peak)가 있다. 뉴욕에서 필자가 경험한 피크 레스토랑은 뉴욕의 특징과 감성을 고객과의 접점에서 다양성 안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한 곳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록웰 그룹의 디자인 방식과 피크 레스토랑의 공간 브랜딩을 주제로 브랜드 토크를 이어나간다.
미드타운 맨해튼 서쪽의 첼시, 미트 패킹 지역의 철로를 공중 산책로로 재개발한 하이 라인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허드슨 야드를 만난다. 이곳은 1970년대 철도회사인 펜 센트럴 (Penn Central)이 파산하기 전까지 철도 기지로 활용되던 곳으로 여러 차례의 재개발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1990년에는 뉴욕 양키스의 경기장 후보로 오르기도 했고, 2012년 뉴욕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미디어센터, 올림픽 광장, 올림픽 스타디움을 건설할 계획도 있었으나, 올림픽 개최지가 런던으로 최종 결정된 후, 이 계획은 무산됐다. 맨해튼 내에서 대중교통의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고 수차례의 개발 계획이 무산되면서 이곳은 잡초가 무성한 버려진 철도 기지로 전락하게 됐다.
이후, 2009년 고급 주거, 상업 및 문화시설로의 개발 계획이 수립되고 대규모 투자 유치를 하며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이는 1930년대 록펠러센터(Rockefeller Center) 건설 이래 80년 만의 뉴욕시 최대 민간 개발 건축사업이라고 한다. 11만 2000㎡(약 3만 4000평)의 부지에 250억 달러(약 28조 원)의 사업비가 책정된 사업은 고급 주거 단지, 쇼핑몰, 오피스, 호텔, 아트 및 문화 센터, 교육 시설을 포함한 대규모 복합단지로 총 2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2012년 말 착공 시작해 2019년 초 1단계 사업인 이스턴 야드(Eastern Yards)를 완성했고, 2020년 코로나19로 또 한 번의 위기에 봉착해 난항을 겪고 있지만, 2024년까지 2단계인 웨스턴 야드(Western Yards)의 완공을 위해 노력 중이다.
허드슨 야드의 최고 인기 장소 중 하나는 허드슨 야드 건물(30번지)의 100층에 위치한 전망대 엣지(Edge)와 101층의 레스토랑 및 바인 피크다. 뉴욕의 가장 최신 전망대인 엣지는 ‘모서리’라는 뜻의 이름에 걸맞은 뾰족한 삼각형의 상부가 뚫려있는 야외 구조물이 건물을 관통하는 엣지 있는 형태(그림 2)를 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한 층 올라가면 록웰 그룹이 공동투자 및 설계한 피크가 있다. ‘절정’, 정점’, ‘정상’의 의미를 가진 피크는 건물의 최고층임을 강조하면서 허드슨 야드 및 맨해튼 최고의 레스토랑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담고 있는 네이밍이 아닐까 싶다.
피크 레스토랑의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30 허드슨 야드 쇼핑몰 건물 1층에서 피크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려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바라본 피크는 어두운 입구를 통해 금빛의 조명이 반짝인다. 입구의 리셉션 데스크에서 예약 확인을 하면, 공간 안쪽에 있는 101층으로 가는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한다.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쇼핑몰과 레스토랑의 명확한 구분과 프라이빗한 고객 경험의 극대화를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피크가 있는 복합 건물은 하단부인 5층까지 아트리움(Atrium) 형식으로 설계돼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밝은 조명으로 밝고 경쾌한 느낌이다. 레스토랑의 입구가 쇼핑몰의 5층에 있는 만큼 분위기를 전환시키지 못할 경우, 고객은 피크 레스토랑을 떠올릴 때 쇼핑몰의 분위기와 연상시킬 가능성이 높다. 건물의 쇼핑몰 역시 하이엔드 고객을 대상으로 설계했다고는 하나 유동인구가 많고 복잡한 쇼핑몰의 분위기와 고급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오버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같은 건물 내에서 다른 용도의 시설이 공존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입구를 완벽하게 분리하고 상반된 분위기로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피크 레스토랑은 1층에서 올라갈 때부터 쇼핑몰의 다른 층과의 동선이 철저하게 분리된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게 하고, 레스토랑 입구도 쇼핑몰의 밝은 이미지와 상반되는 어둡고 우아하면서도 따뜻하고 세련된 공간으로 꾸몄다.
피크 레스토랑의 브랜딩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곳을 설계한 록웰 그룹을 소개한다. 록웰 그룹은 무대 디자인을 기반으로 호텔 및 레스토랑 설계로 영역을 확장한 디자인 회사로 실험적이고 다이나믹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혁신적인 소재와 창의적인 디자인을 위해 직원들에게 근무시간의 일부를 새로운 소재 개발 및 아이디어를 창출하는데 활용하기를 권장한다. 1999년에 뉴욕 W호텔 시작으로 특급 호텔의 디자인으로 영역을 확장한 록웰 그룹은 다양성 안에서 일관성을 선보인다. 정형화된 통일감보다 다양한 소재와 형태의 요소들이 한 목소리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간을 설계하기 전, 최대한 해당 브랜드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과 핵심 가치를 파악하는 노력을 한다. 이는 오너, 직원, 고객을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만나서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록웰 그룹이 이해관계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당신은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다. 이에 대한 답변을 바탕으로 설계를 하기에,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공간에 스며들어 표현되는 디자인이 가능하 다.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대화 중 빠질 수 없는 것은 식재료와 음식의 맛과 관련된 것이리라. 내가 먹고 있는 식재료를 활용한 장식이나 소품이 레스토랑의 디자인 요소로 활용됐다면,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되고 기억에 남는 공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또한, 이는 시각적인 요소 간의 통일성을 뛰어넘는 식재료와 디자인 요소 간의 통일성으로, 미각, 촉각, 시각을 아우르는 일관성이라 볼 수 있다.
뉴욕의 작은 스시집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레스토랑으로 발전한 노부 레스토랑은 1994년부터 록웰 그룹과 전 세계 20여 개가 넘는 지점을 오픈했다. 노부 레스토랑은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홍콩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노부 레스토랑은 레스토랑의 주 메뉴 중 하나인 전복의 껍질 수만 개를 활용한 천장 디자인으로 유명하고, 뉴욕의 노부 57은 흰색 전복 껍질 수천 개로 만든 샹들리에가 달려있다. 이외에도 대나무가 박힌 주물 테라조, 전복 껍데기와 성게로 만든 조명 기구, 일본의 천연 소재인 아바카 섬유로 만든 곡선 벽면 등, 각 지점마다 유사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반영된 독특한 소재로 일식당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한다.
노부 레스토랑의 창업주 ‘노부 마츠히사(Nobu Matsuhisa)’는 록웰 디자인에 대해 평하길 “록웰의 시그니처 디자인은 새로 오픈하는 레스토랑마다 유사하면서도 다르게 정체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록웰 그룹이 공간을 디자인할 때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일관된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크는 노부 레스토랑처럼 식재료를 디자인 모티프와 연결 지은 곳은 아니지만, 록웰 그룹이 추구하는 다양성 속 일관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5층의 입구 부분과 101층의 두 개의 공간이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을 풍긴다(그림 3). 밀폐된 공간에서는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끼기 십상이다. 이러한 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5층 공간은 다양한 금빛 조명과 어두운 톤의 가구 및 소품을 활용해 아늑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반면, 101층은 뻥 뚫린 시원한 전망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스타일과 색상의 가구 및 조명을 활용했다. 뉴트럴 톤을 활용해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레스토랑 전체의 분위기가 바뀐다. 낮에는 맨해튼 하늘 및 강과 연결되고 밤에는 은은한 조명과 함께 반짝이는 뉴욕의 야경과 연결되는 공간이다.
101층의 샹들리에는 삼각바 형태의 유리 막대로, 일몰 후 반짝이는 스카이라인과 병치되는 반짝이는 구름을 모티프로 제작한 것이다. 독특한 디자인이지만,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체 공간과 조화를 이룬다. 5층의 밀폐된 공간에서는 다양하고 화려한 뉴욕의 모습이, 101층의 공간에서는 시크하면서도 포용성을 가진 뉴욕의 개방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이렇게 다른 두 개의 공간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디자인 및 사용된 소재 때문이다. 두 공간 모두 직선과 곡선을 조화롭게 활용해 지루하지 않은 공간 연출을 한다. 5층은 직선 형태의 바 카운터 뒷벽 장식과 유선형으로 나열된 라운지 공간을 병풍처럼 감싸는 조명 기둥이 조화를 이룬다. 101층 역시 유선형의 바 카운터와 좌석이 직선 형태를 한 유리창의 금속 기둥과 삼각바 샹들리에와 공존하는 모습이다. 다양한 소재 중 가장 눈에 띄는 유사 소재는 대리석 바닥과 금속 천장이다. 유선형 패턴으로 진한 회색과 연한 회색이 배치된 대리석 바닥에는 금빛 곡선이 수 놓여 있다. 또한 두 공간 모두 금빛 색상의 반사되는 금속 재질의 천장 장식을 활용해 공간감과 세련됨을 제공한다.
인테리어 디자인뿐 아니라 피크의 메뉴에서도 뉴욕시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레스토랑의 셰프인 크리스토퍼 크라이어(Christopher Cryer)는 정상에서 내려다본 뉴욕시의 전경에서 영감을 받아 메뉴를 만들었고 플레이팅을 한다. 메뉴는 지역의 농부와 어부로부터 공수해오는 재료로 Land(육류), Sea(해산물), Garden(샐러드)의 3종류로 구성된다. 미국답게 점심 메뉴는 아메리칸 와규 버거($34)가, 저녁 메뉴는 30일간 숙성시킨 드라이 에이지드 스트립 스테이크($75)가 레스토랑의 추천 메뉴다.
셰프는 뉴욕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맨해튼은 도시섬으로 3개의 강, 허드슨, 이스트, 할렘 리버를 접하고 있고, 도심 가운데에는 뉴요커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약 103만 평에 달하는 센트럴 파크가 있다. 필자는 피크에서 맨해튼 뷰를 바라보며, 메뉴의 Land는 맨해튼의 땅, Sea는 맨해튼을 감싸는 3개의 강, Garden은 센트럴 파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인테리어에 주도적으로 활용된 색상인 금빛과 연회색은 테이블 세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테이블 위 노란색 꽃 장식, 황금빛의 투명한 유리잔, 연회색 테이블 냅킨, 동글동글한 금빛 소금/후추 그라인더와 은빛과 금빛의 중간 색상인 실버웨어가 조화를 이룬다(그림 4). 미니멀한 디자인의 흰색 식기에도 금빛 물방울 혹은 작은 나뭇잎 패턴이 있어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그대로 잇는다.
이번 사례에서 살펴봤듯이 브랜딩을 할 때의 필수 조건 중 하나인 일관성은 정형화된 통일성만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형화된 통일성은 뻔하고 식상하게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는 지역 및 공간 브랜딩을 포함한 모든 브랜딩에 적용된다. 통일감을 위해 획일화된 색상과 형태로 브랜딩을 할 경우, 지루하고 유치한 1차원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브랜드 정체성을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은 고객과의 접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다른 요소들을 현명하게 활용해 은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지만, 고객이 해당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때 자연스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공간 브랜딩은 고객으로 하여금 브랜드가 일관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기대하게 하며 궁금증을 유발하는 고차원의 방식이다.
앞으로 호텔이나 레스토랑을 방문할 때, 각 고객과의 접점에서 브랜드 정체성이 표현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대놓고 드러내는 1차원적인 방식인지, 유사하면서도 다른 요소들을 조화롭게 연결해 표현하는 고차원적인 방식인지 평가해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