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호텔 앤 레스토랑> 5월 호 기고문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보스턴에는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조경의 공원이 있다. 바로 도심 속 아기자기한 공원인 보스턴 퍼블릭 가든이다. 이곳은 습지를 개간해 1837년에 탄생한 미국 최초의 공립 식물원이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정원 예술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은 다양한 꽃과 수목으로 디자인한 덕에복잡한 도시와 분리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이 공원은 실제 유명한 동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공원 안에 있는 오리 가족 동상은 보스턴시와 시민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보스턴시는 이 동상을 활용해 창의적인 방법으로 도시민과 소통하고 공감을 바탕으로 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 사랑스러운 보스턴의 랜드마크를 만난 시민들은 자발적인 홍보대사로 거듭나 도시 브랜딩에 참여하며 도시의 내러티브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이 오리 가족 동상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고, 보스턴시는 오리 동상을 어떻게 활용할까? 이번 브랜드 토크에서는 도시 브랜딩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소통에 대해 다룬다.
도시 브랜딩의 목적은 도시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도시민, 관광객, 사업자 등)가 각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경험과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며 도시의 이미지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도시 브랜딩은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며 사회 공간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집단적인 프로세스다. 도시의 관료들에 의해 도시 브랜딩이 이뤄지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특히 도시민을 브랜딩 프로세스에 참여시키고 그들이 자발적인 브랜드 외교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장소에 연결하고, 그들이 속해있는 도시를 변화시키며 발전시킬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시민을 브랜딩 프로세스에 참여시키는 여러 방식 중 효과적인 것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소통이다. 이는 도시가 일방적으로 전하는 형태의 소통이 아닌, 도시와 시민 혹은 시민 간의 쌍방향의 소통을 의미한다. 사람들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지속적인 내러티브와 역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스턴 퍼블릭 가든에는 유명한 오리 가족 동상(Make way for Ducklings Statue)이 있다(그림 1). 이 동상은 1941년에 쓰인 동화 ‘Make Way for Ducklings’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동화의 내용은 청둥오리 말라드(Mallard) 부부의 보금자리 마련을 위한 여정으로 시작해 보스턴에 정착한 후 가정을 꾸리는 내용이다. 여느 부부나 거주지에 대한 일치를 하기 어렵듯이 말라드 부부도 그동안 여러 곳을 돌며 의견 일치가 어려웠는데, 보스턴은 둘의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보스턴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현실을 반영한 대목이다.
이 동화는 미국의 동화 작가인 로버트 맥클로스키(Robert McCloskey)의 작품이다. 보스턴의 예술 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한 맥클로스키 역시 보스턴과 보스턴 퍼블릭 가든의 매력에 푹 빠져 이 작품을 작성했으리라. 이 작품은 매년 여름 어린이 도서관 협회에서 수상하는 문학상으로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알려진 칼데콧 상(Caldecott Medal)을 수상했다.
동화 곳곳에 보스턴의 명소들과 함께 퍼블릭 가든도 등장한다(그림 2). 보스턴의 찰스 강변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부부는 8마리의 아기 오리를 낳아 키우며 엄마 오리가 아기 오리들을 이끌고 퍼블릭 가든에 산책하러 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1985년, 도시 계획가인 수잔 드몽슈(Suzanne DeMonchaux)가 공공예술 조각가인 낸시 쇤(Nancy Schön)에게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엄마 오리(Mrs. Mallard)와 아기 오기들의 모습을 본뜬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이에 2년에 걸쳐 제작된 이 작품은 1987년에 보스턴의 귀여운 랜드마크로 탄생했다.
이 동상은 보스턴의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모든 연령대의 방문객에게 사랑받는 보스턴의 명소 중 하나다. 38인치의 크기인 엄마 오리 위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과 오리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누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그림 3). 사람이 붐비는 시간에 방문하면 오리들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이들은 보스턴의 인플루언서다.
보스턴의 명물인 오리 동상은 미국의 공휴일, 시즌 별 혹은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는 귀엽고 익살맞은 의상을 선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시민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오리들의 의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보스턴 퍼블릭 가든에 때때로 들러서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필자 역시 이 오리들을 만나러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공원을 방문하는 것이 루틴한 일상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오리 가족이기에 오리들의 전담 코디네이터는 시민들의 관심을 유지하며 지속적인 소통을 하기 위해 아마도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리들의 의상은 보스턴 지역 뉴스에도 종종 소개가 될 정도로 이슈의 중심에 있다. 또한, 오리들의 패셔너블한 모습은 시민들이 소셜 미디어에 오리들의 의상을 공유하며 보스턴시의 홍보대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필자도 소셜 미디어에 오리들의 의상을 종종 포스팅했고,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오리 사진 잘 보고 있다’, ‘보스턴에 놀러 갔을 때 보고 오지 못해 아쉽다’, ‘오리들을 보러 보스턴에 놀러 가고 싶다’, ‘보스턴의 오리 동상 사진을 계속 올려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보스턴시는 오리 동상을 활용해 시민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 추모의 공간, 보스턴의 문화 및 뉴스 전달, 공휴일 및 특별 연휴 기념, 정치 및 사회적 메시지 등의 다양한 소통 창구로 이용되는 오리 가족 동상을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오리들이 전하는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
2013년 4월 15일에 발생한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사건은 보스턴에서는 잊지 못할 아픔이다. 폭탄 테러 이후 저하된 시민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Boston Strong’이라는 표어와 ‘마라톤 수선화’라 불리는 화분이 탄생했다. 매년 4월, 노란색과 파란색을 활용해 표어를 디자인하고 파란색 화분에 노란 수선화를 담아 오리 동상을 장식해 폭탄 테러 사건을 추모하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그림 4). 이 시기는 기독교의 부활절과 겹치기도 해서 부활절 기념 계란으로 장식하기도 한다(그림 4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보스턴의 이모저모 소식 전달
오리 동상이 꾸며진 모습만 봐도 보스턴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보스턴의 스포츠팀이 경기에서 이겼을 경우, 오리들은 해당 팀의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승리를 축하하며 시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그림 5는 보스턴의 야구팀인 레드 삭스(Red Sox)의 유니폼과 보스턴이 속해 있는 뉴잉글랜드 럭비 연합인 프리 잭스(Free Jacks)의 유니폼을 입은 오리 동상의 모습이다.
공휴일 및 특별 시즌 기념
미국의 공휴일이나 특별 시즌을 기념하기 위해서도 오리 동상은 옷을 갈아입는다(그림 6). 덕분에 공휴일이나 기념일을 앞두고 오리 동상의 의상을 확인하는 것도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 패트릭을 기념하는 St. Patrick’s Day 기간에 오리들은 이 날을 기념하는 초록색 의상으로 갈아입는다. 여름휴가 기간에 오리 가족도 바캉스 룩을 선보이고, 할로윈 기간에는 할로윈 의상을 입기도 한다. 추수감사절에는 보스턴에 정착한 영국의 청교도 의상을 입은 오리 가족을 만날 수 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가 된 오리들을 볼 수 있다. 음력 새해에는 중국식 겨울 의상을 선보이기도 한다. 특히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 기간에는 더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시민들의 기분 전환을 책임졌다. 또한,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했으며(그림 6 상단 좌측), 의료진들을 향한 응원과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그림 4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정치 및 사회적 메시지
오리 가족은 정치 및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그림 7). 인권 문제가 뉴스에서 거론될 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항하는 사회 운동으로 시작한 ‘Black Lives Matter(BLM)’의 메시지를 전하는 의상을 입기도 한다. 2020년 10~11월에는 미국 대선을 앞두고 투표를 독려하는 ‘VOTE’가 수 놓인 의상을 선보였다. 2021년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독려할 때는 백신 완료 스티커를 붙인 오리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오리 가족 동상이 보스턴의 랜드마크이자 소통 창구로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과거, 현재, 미래를 이으며 오랜 기간 동안 켜켜이 쌓아가는 의미 있는 스토리다. 이 과정의 발단은 도시 계획자의 탁월한 안목과 통찰력이었다. 수잔 드몽슈는 과거의 도시 스토리를 미래와 어떻게 연결시킬지를 고민했고, 그에 맞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이 결과, 보스턴에서 공부한 동화 작가의 작품 속 주인공이 40년 후 보스턴에 거주한 조각가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 동상에 얽힌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오리 동상으로만 보일 수 있지만, 배경 이야기를 알게 되면 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보스턴에 실제 거주했던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결과물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적인 기념물이기에 시민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퍼블릭 가든의 라군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청둥오리를 보고 있노라면 80여 년 전 맥클로스키가 어떤 생각을 하며 동화를 써 내려갔을지, 40여 년 전 드몽슈가 어떤 비전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했을지, 쇤이 어떤 마음으로 동상을 조각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두 번째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창의적인 소통방식이다. 방치될 뻔한 오리 동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의상과 소품을 활용한 이목을 끄는 커뮤니케이션 방식 덕이다. TPO에 맞게 의상을 갈아입히는 행위는 무생물인 동상에 인격을 부여한다. 소소한 흥밋거리로만 여겨질 수 있는 다채로운 의상이 오리 가족을 만나러 오는 누군가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공원에 방문한 사람들의 입꼬리가 올라가게도 하고, 오리를 타보고 쓰다듬고 싶게 하며, 패셔너블한 오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찍은 사진은 소셜 미디어와 뉴스를 통해 공유되며 도시를 상징하는 기록물의 형태로 도시의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보스턴시가 오리 동상을 통해 만들어가는 도시 브랜딩은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좋은 사례다. 시의 공무원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80여 년간 지속적으로 유지한 결과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지속적으로 쌓아가며 차별화된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