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 디셈버, 도덕적 기준과 본능의 사이 그리고 사랑.
그레이시와 조는 얼핏 보기에 그저 나이차가 조금 있는 부부같아 보이지만 사실 23년의 나이차보다도 조가 13살의 미성년자일 때 만났던 사이라는 점에서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뉴스의 주인공들이다. (May(5월, 즉 봄)과 December(12월, 즉 겨울) 나이차이가 큰 커플을 의미하는 말.) 20년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게 되며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될 여배우 엘리자베스가 찾아오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 도덕과 (도덕에서 발현되는 옳고 그름, 규칙과 기준) 본능(욕구, 감정)의 사이. 미성숙한 어른의 사랑의 문제에서의 도덕적 질문.
그레이시는 과거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대하여,그녀 자신이 얽힌 관계에서는 도덕적 문제를 아예 걷어내버린다. 그녀는 항변한다. 그것이 인생의 사랑이었다고. 그 이유만으로 어떤 도덕적, 사회적인 기준을 가볍게 깔아뭉게 버린다. 13살의 어린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을 “리드”했다고 믿는다. 자신은 어린 시절엔 형제들을 통해 과보호를 받고 살아왔으며 과거 전남편과 결혼 후에도 남편밖에 몰랐기에 미성숙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반면, 남편은 어린나이에도 가장으로서 누군가를 돌본 “어른”이라고 결론내린다. 어린 그가 자신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결정내리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는점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려하지 못한다, 아니 외면한다. 자신의 19살 아들에게는 그가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말에 억지로 앉히고 우유라도 먹으라며, 과도하게 아이 대하듯이 하고 통제하려 들면서 말이다.
미성년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은, 법적으로는 성착취로 분류되어 처벌을 받는다. (그레이시는 복역 중에 아이를 낳고 복역 후 조와 결혼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그 둘의 사랑이 진심이라면 미성년자라는 그 이유만으로 도덕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며 비난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하는 질문이 떠오르긴 한다. 사실은 도덕적으로 옳다, 이래야만 한다, 라는 암묵적인 기준은 사실상 헤집어보면 어떤 확실한 근거에서 생긴 게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36살의 그레이시는 13살의 조와 사랑에 빠질 때 “미성년자는 아직 생각과 관념이 성숙해지진 못한 미성숙한 존재로 어른이 잘 이끌어줘야 한다”라는 도덕적인 관념을 자신의 상황에서만묵살해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를 이용한 것이 아닐까. 조는 자신이 36살이 되어서야 자신과 그레이시가 외면해왔던 그 도덕적 의문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순진하고 아이같다. 그 순진한 아이 상태의 그녀를 남편 조는 어른처럼 달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남편을 자신의 또다른 자녀를 대하듯이 “부린다.”
과거의 그레이시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하면 누구든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사랑으로 낳았으니 자신의 아이들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일군 자신의 가정이 완벽할 것이라 믿는다.
그녀는 사회생활을 그럭저럭 해나가는 듯하나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는 것 같으면 마치 아이처럼 문제를 받아들이고 그 아이의 감정을 남편에게 쏟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부모가 어르고 달래듯이 어린 남편 조는 그녀를 달랜다. 그녀가 만든 케잌을 주문자가 취소했는데 “자기가 이렇게나 열심히 케잌을 만들었는데”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에 “오열한다”. 그 주문자는 그저개인적 사정으로 취소하게 되었을 뿐인데도..
그녀는 그러면서 동시에 통제적이다. 자신이 원하는 상태를 위해 그의 남편을 아들처럼 “부린다”. 어떨 때는 너무나 유약하고 의존적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에서는 매우 통제적인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유약할 때는 그녀를 토닥거려주고 평상시 다소 자기중심적인 그녀의 지시에도 묵묵히 따른다. 마치 그녀를 위해 길들여진 모습을 보인다.
- 남편 조는 36살이 되어서야 과거의 자신을 직면하고 “제대로” 무서워한다.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에 비정상적으로 충실해보이고 그레이시가 원하는 대로만 사는 듯한 조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너는 니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어른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과거를 파헤치는 그녀와의 시간으로 조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묻어왔으나 두려워서 묻어왔던 질문을 직면한다. 정말로 자신은 그레이시를 사랑한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고 책임지기에는 자신이 너무 어린 나이이지는 않았는지 하는 “의구심”을 꺼낸다.
그리고 조가 그레이시의 표현처럼 어린 나이에 가장처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실상은 부모가 무관심 아래그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그를 이끌어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그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아이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러한 상태였다는 것을 자녀들을 키워내며 오히려 깨달았을 것이다. 조는 자녀들에게 관심과 책임감이 큰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였다. 그리하여 조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의구심을 꺼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는 자녀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까 두려워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로 사랑한다는 결정을 제대로 하여 낳은 아이들이 아니라면, 그 아이들의 존재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걱정과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까싶은 두려움에 몸을 떤다..(그 와중에 그레이시는 그런걱정은 하지도 않는다.)
- 조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이곳에 남을것인가 떠날 것인가.
남편 조가 나비를 키우는 행위는 그가 “스스로 원해서”키우기로 결정하여 스스로 키워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그 나비를 꺼내어 떠나보낸다. 단순히 아이들이 나이가 되어 졸업하면서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단으로 자유를 준다.
그리고 자신의 결단으로 그 의구심에 답을 내릴지, 그 내린 답이 세상으로 나가는 자유로운 나비처럼 자신 또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일지 여전히 그레이시의 남편으로서 남는 것일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자신이 그 나비같다고 느끼고 나면 예전과 같은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 내면의 아이같은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역설
이 영화의 어떤 후기에서 이런 내용을 봤다. (아이같이 울고 원하는 것을 내뿜던) 어린아이같던 그레이시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자아가 탄탄하다고 말하고, 어린나이임에도 보호자를 자처하던 그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나니 사실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나지못했음을 깨닫는다는 역설이 인상깊었다.
즉, 그레이시와 조는 성인이 된 후 진작 다루었어야 할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어른이 진작 했어야 할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시간은 흘렀으나 어린나이에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던 그 시간에서 변한게 없다. 표면적으로는 어른처럼 살아왔더라도 그 시기에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직면하는 과정이 없었기에 그대로 멈춰있었음과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36살의 조는 36살의 그레이시와는 다르게, 어떤 도덕적 기준과 자신의 욕망 그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대로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걸음 실질적으로 어른이 될 수 있고 어른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성숙한 어른에 의해 휘둘린 시간이라는 댓가가 클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