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나의 여행은 이웃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 버려서, 애국심 넘쳐 나는 미국인들답게 내가 어딘가를 다녀올 때마다 마치 자기들이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하며 다음 행선지를 묻곤 한다. 여기 1년밖에 머물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 곳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나의 여행지가 죄다 서부와 동부에만 치우친 것을 알고는 이웃들은 이제 중서부를 가야 한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마침 시카고 근처 밀워키에 대학 동기가 1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미국에 온 이후로 이 친구가 늘 한 번 시카고에 오라고 했었기에 겸사겸사 주말에 짬을 내어 밀워키와 시카고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밀워키는 시카고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라 함께 돌아보기에 부담이 없다. 일정을 어떻게 짜나 고민했는데 친구 말이 시카고 먼저 보고 밀워키를 보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며 일단 밀워키부터 보라고 한다.
§ 열대 바다가 연상되는 에메랄드 빛 미시간 호수와 호숫가에 위치한 밀워키 미술관의 내부 모습. 넓은 창을 통해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물 색깔만 보면 무척 따듯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여름에도 아주 차가워서 수영을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물론 미국 애들은 물이 암만 차도 아랑곳 않고 잘 놀더라.
미시간 호숫가에 위치한 밀워키는 작고 아담한 도시로 첫인상이 아주 깔끔하고 예뻤다. 워낙 거대해서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미시간 호수는 위치에 따라서, 또 날씨에 따라서 물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 날은 햇살이 좋아서 마치 열대 바다처럼 투명하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호수 근처에는 공원이 여럿 있어서 마음 같아서는 다음 일정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호수만 바라보고 싶었다. 바람까지 열기를 품은 습하고 무더운 조지아와는 달리 여기는시원한바람이 불어와 더 기분이 좋다. 여기가 천국이다 싶은데 친구 말로는 일 년에 딱 2주만 더워서 다음 주만 되어도 이불 없이는 못 자고,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사시사철 쾌적한 낙원은 지상에는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담한 밀워키 다운타운의 모습. 이곳을 중심으로 상업용 주요 건물과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호수 옆 중심가에는 고층 빌딩들과 식당, 카페 등은 물론 농구장, 할리 데이비슨 본사 등 주요 관광지들이 밀집해 있다. 마치 범선처럼 보이는 밀워키 미술관은 날씨가 좋으면 건물 좌우의 날개를 펼친다고 하는데 내가 간 날은 바람이 세서 날개가 접혀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간 할리 데이비슨 박물관에는 마침 끼니때라 그런지 주차장에 으리으리한 고가의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단체 라이딩이라도 하던 중인가 보다. 오토바이들이 너무 화려하고 신기한데 남의 물건이라 너무 빤히 구경하기가 뭣해서 대신 박물관 앞에 세워진 전시용 오토바이에 올리타 보았다. 보기와 달리 굉장히 편해서 놀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거리용 모델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음, 오토바이가 아무리 편하다한들 장거리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장거리 여행에서는 드러누울 수 없다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밀워키 대표 커피 맛집인 <콜렉티보>의 컬러풀한 정원과 할리 데이비슨 박물관. 커피 한 잔 손에 들고 호숫가를 걷는 기분이 무척 근사하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밀워키 농구팀의 경기장을 둘러보고 나서 다운타운에 있는 치즈 상점에 들러 치즈와 소시지를 샀다. 위스콘신이 유제품으로 유명해서 이곳 치즈를 꼭 먹어야 한다며 친구의 아내가 몇 개 사주기에 염치없이 덥석 받았는데,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욕심이 일어 더 사버렸다. 다음 일정은 브루어리 투어이다. 밀워키는 물이 좋아 로컬 브루어리가 많고 밀러의 본사도 여기 있다. 원래는 밀러에도 투어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현재는 코로나로 투어가 중단되어 대신 <레이크 포인트>라는 브루어리를 찾아갔다. 창업 당시에는 돈이 없어 비싼 맥주 발효 탱크 대신 우유 탱크 - 위스콘신이 낙농업 지대인 만큼 다행히 우유 탱크 구하기는 쉬웠다는 모양이다 - 에서 만들어야 했다는데, 지금은 미국 내 여러 주에까지 공급하는 큰 양조장으로 성장해 투어 프로그램까지 갖추고 있는 것을 보니 제대로 성공한 듯하다.
§밀워키 로컬 브루어리인 <레이크 포인트> 브루어리는 투어를 제공해서 시음도 하고 양조장 내부를 둘러볼 수도 있다. 오른쪽은 밀워키 Bucks 경기장 앞의 소화전. 팀의 테마 색을 칠해 놓은 것이 귀엽다.
브루어리 투어를 마치니 시카고행 기차 시간이 다 되어 역으로 향했다. 밀워키는 대중교통이 있기는 하나 배차간격이 커서 차가 없이 다니기는 불편하다고 하는데 하루 종일 기사와 가이드 역할을 해준 친구 덕에 짧은 일정에도 많은 곳을 편하게 돌아볼 수 있어 너무 고마웠다. 뭐니 뭐니 해도 지인 찬스가 최고이구나 싶다. 한참을 달려온 기차가 시카고에 들어서자 창밖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대도시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금 전 보았던 소박한 밀워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니새로운여행을 떠나온 기분이다. 나는 덜컹이는 캐리어를 끌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빌딩 숲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마치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힘차게.
§밀워키 운하의 야경. 나는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는 시카고를 보면 여기 운하 따위는 눈에도 안 들어올 거라고 했고, 실제로 시카고에 가보니 규모와 화려함의 차이가 워낙 커서 친구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작고 조용한 소도시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