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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너의 졸업 나의 졸업

by 양해연


이번 주 금요일.

내가 키우는 아이가 유치원 졸업을 한다. 한 달 전, 2주 전 까지만 해도 학교에 초점이 맞춰서 걱정이 앞섰는데, 당장 이번 주로 식을 앞두니 비로소 ‘졸업’에 시선이 머물렀다. 졸업이란 단어는 아직 이 아이보다는 나에게 가까운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19세 해연이가 불쑥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지겨울 새도 없이 매일을 쫓기듯 현실을 살면서도 가끔은, 영 현실에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하루는 아이가 네 살 무렵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 가는 길에 놀란 적이 있다. 집 근처 마트 앞이었는데 교복 입은 여고생이 있었다. 이게 왜 놀랄 일이냐 하겠지마는, 이른 아침 교복 입고 학교 가는 그 아이의 모습에서 한때 익숙했던 내 모습을 마주한 것이었다. 하필 그날따라 나는 세수와 양치만하고, 화장은커녕 옷도 겨우 입고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생활에 찌든 아줌마 면모의 어느 무엇보다도, 내 옆의 아장거리는 아이가 너무나도 내가 아줌마라는 걸 인증 하고 있었다. 그 아이를 통해 본 내 모습이 ‘과거’라는 것에 놀랐고, 그것을 지금 이렇게 반짝거리게나. 느끼는 나를 보고 두 번 놀랐다.


시간은 나에게만 멈추어 있는 것 같다. 나도 이런 내가 어처구니없긴 한데 그게 나다. 대신 나는 매일의 나와 우리를 신기해하고 기특해 할 줄 아는 특기가 있다. 이를테면 주말부부라 평일에 온전히 혼자 아이를 돌보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엄마 된 내 자신이 기특해 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말에 육아와 가사가 주는 건 아니다). 그 흔한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돈을 버는 일을 하는 40대 아빠가 된 남편도 기특하다. 태어난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커서 놀기 좋아하고 잘 자고 대들 땐 대드는 만6세 어린이도 기특에서 빼면 섭하다.


기특은 집밖에서도 이어진다. 유치원, 학습지로 만나는 아이의 앳된 선생님들도 기특하고, 우리 아이를 가르치지 않아도 유치원 하원 길에 마주치는 태권도 사범님도 기특하다.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내어 주는 바쁜 사장님과 아르바이트 점원분도 기특하다. 여기서 기특의 결 이란 감사와는 느낌이 다르다. 좋은 마음이 우선하는 사람들이니 감사는 기본으로 깔고, 기특을 더한 거랄까. 육아역사가 제법 연차수가 쌓인 탓인지, 일상에서 당연하게 보이던 것들이 당연하지만은 않게 볼 줄 알게 됐다. 이내 나이가 나보다 어리거나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사회인들에게는 ‘기특’이라는 정서가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나는 으른의 삶을 살면서 수시로 기특해 한다. 새삼스럽고 낯간지럽기도 하겠지만, 가끔 이 시선은 온갖 불안에서 나를 빼내어 주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이를 이렇게나 먹고도 아직도 설거지가 불만이고, 식사메뉴 정하고 요리하는 것이 즐겁지 아니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이제는 뜻대로 선뜻 도전하지도 못하는 것에 속앓이 하는 모습들이 영 마뜩찮다가도 운 좋게 시선을 돌리면 모든 게 기특해 지는 것이다.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챙기고, 아이와 함께 먹을 사과를 깎아, 따뜻한 물, 15초 데워진 빵 2조각을 준비하고, 차를 태워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와서는, 집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살림을 해내지 않는가. 무엇보다 누구도 이것을 시키지 않았다. 모든 것은 스스로 한다. 비록 책임과 의무가 가득한 억지일 지라도, 기특해 죽겠는데 어쩌겠는가.


그렇게 문득 나는, 치열하게 공부하다가도 낭랑만으로 벅찼던 19세의 내가 되곤 한다. 19세 해연이가 보면, 엄마이고 어른의 당연한 일들이 집밖에서 쌓는 업적과는 다른 결로다가 대단한 일들이 된다. 이 신기해하는 마음이, 지금의 불만을 달래거나 추켜세우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기특이라는 정서 자체에 기인하는 것임은 더욱 뚜렷하다. 그렇게 문득 찾아오곤 하는 19세 해연이는 나의 첫 리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배가 부른 기억이 없게 먹고 살찌우며 웃고 지지고 볶던 그 때가 해연이라는 자아가 가장 순수하고 기쁘게 발현됐던 첫 번째 시기라고 믿고 있다.


3년을 내리 함께한 나의 고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로 약 15분 정도 거리에 있던 가톨릭재단 사립 여자고등학교였다. 거기가 가톨릭학교라서 간 건 아니었다. 당시 내가 살던 경기도의 한 도시에는 여고가 2개였는데 바뀐 수능제도에서는 내신을 잘 따는 게 조금 더 유리할 거란 의견 때문에 좀 덜 치열해 보이는 2인자 여고로 엄마가 나를 보내버린 것이었다. 애초에 집주변에 널리고 깔린 남녀공학은 후보지에도 없었다. 공부할 시기에 한눈팔면 안 된다나 뭐라나. 실제로 남녀공학으로 진학을 한 친구들 중엔 남자친구 안 사귀는 애가 드물었다. 무엇보다 나는 고등학교에 가자마자 무섭게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눈에 띄게 예뻐졌다. 정작 중학교 때는 짝사랑조차 하지 않았던 애들도 애인을 사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의 여고강제진학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했다. 일곱 살 때부터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던 나는 그걸 중학교 때까지 쉬질 않았다. 하물며 사춘기 폭발 17세라니 아마 한눈이 아니라 두 눈을 팔아 갖다 바치고도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공부에 도움이 될 거란 이유뿐으로 간 학교가 중학교랑은 딴판이었다. 아파트 숲과 도로 한 가운데 네모나게 덩그러니 있었던 중학교와 달리 여기는 아파트와 번화가와는 한참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다. 중학교가 정말 갈색네모, 그 뿐이라면 여기는 갈색에 녹색도 있었고 네모보다는 조금 휘어진 긴 네모 몇 개가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매점이 있었다. 학교 안에는 수녀님들을 볼 수 있었고, 학교 옆으로는 시장도 있고, 큰 병원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17살이 됐는데도 스무 살이란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은 미지와 환상의 세계였다. 난자 하나만을 향해 달리는 쏟아진 정자들처럼, 모두가 일단은 대학간판 하나만 보고 달려가면서도 스무 살만큼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멋들어지는 대학생이 되면 뭐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미지만 있었을 뿐. 영원히 지금처럼 중간고사 기말고사 준비하고 숙제하고 모의고사 수능준비하고 간간히 신문 보며 논술준비도 하고 그럴 것 같았다. 또한 ‘고삼’이라는 제목도 스무 살에 준하는 엄청난 이름이었다. 스물이 막연한 미지와 환상의 영역이라면 고삼은 솔직히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예외 없이 나는 고삼이 되었고, 19세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고삼은 세상의 말처럼 그렇게 쓰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삼이 되보지 않은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과 압박감이 그 이름의 전부인 듯 했다. 고3이 쉽지만은 않은 것도 당연했지만, 우리는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세상이 떠나가라 웃고, 유쾌하기도 했다. 그 때쯤 학교의 녹색은 내게 온전한 푸름으로 다가왔고, 회색 수녀 복을 입고 다니는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가 비로소 내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 졌다. 때가되면 찾아오는 잔디머리 송송난 대머리 담임선생님의 호통에도 시무룩해졌다가 돌아서면 유쾌해지고, 반나절이면 또 선생님한테 반하던 나였고, 우리였다.


리즈의 기준을 ‘순수한 기쁨의 최대치’에 둔다면 단연코 고삼이다. 아마 고삼이 기쁨이자 리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회피를 맞닥뜨림’, 둘째. 거기서 마주한 ‘반전’이 이유일 것이다. 물론 고됨조차 기쁨으로 치환될 수 있기까지 그 당시 나에게 모든 운이 총력을 다해준 덕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의 고삼은 지독했고, 끝이 없을 것처럼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그 19세가 끝나가는 졸업이 다가올 때쯤 나는 이 기쁨을 끝내고 싶지 않아 울었다.


여고의 아침 전체조회가 이루어지는 강당은 미국 틴에이지 영화에서나 보던 학생들의 목소리 같은 우레로 가득 찼다. 어깨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미식축구부 앞에 선 쭉쭉빵빵한 치어리더 무리를 보며 나오는 화려한 함성과 비교해 한국여고생들의 떼창은, 볼륨은 같지만 더욱 끈덕지고 무서운 맛이 있었다. 그 떼창 속에서 울었던 날은 아마도 대부분의 수시전형과 수능마저도 끝나고 이제는 서로가 달라질 학교를 알고 있을 즈음이었다. 수시든 수능이든, 대학이든 재수든 수능만을 큰 맥락으로 봤을 때, 그것은 지독했던 과정에 비해 헛헛함이 따르는 일이었다. 중간 기말고사도 아닌 그 악명 높은 수능이 끝나니 마치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 이 밀려오는 허무감을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고삼의 유쾌함은 지독한 압박이 있기에 비롯되는 미친 몸부림이었는지, 수능이 끝나자 그런 이유도 없이 터져 나오던 웃음기도 옅어지는 듯 했다. 그렇게 약간 시간을 때우듯 지내던 학기말의 전체조회였다.


그때 교가보다 유명한 성가가 있었다. 가톨릭학교라 전체조회가 미사형식이었는데, 그 때마다 부르는 성가는 같았다. 제목이 ‘사랑한다는 말은’ 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아-얀- 찔-레꽃-.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 이-다↗.


이런 사랑스러운 가사를 가진 성가를 우리는 정말 강당이 꽉 차도록, 사랑하기엔 좀 무지막지하게 불러제꼈다. 남녀공학 중학생 딱지를 떼고, 처음에 여기에 온 날 선배들이 미친 듯이 불러대던 이 노래는 분명 시끄럽다 못해 낯설고 좀 미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강당 2층의 널브러진 고3의 한 무리가 되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좋은 이 모습을 마치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 본 순간이었다. 제 2의 교가였던 성가가 점점 클라이막스로 가고 있었다. 곧 눈에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르던 입을 닫고 듣기만 했다.


내 소리를 멈추니 미친 노래가 더 잘 들렸다. 그게 또 좋아서 고인 눈물을 말릴 수가 없었다. ‘노래하는 분위기에 눈물이 웬 말이야 오바야. 말려야 돼. 이렇게 미친 떼창으로 부를 수 있는 게 성가라고. 울지말라고.’ 이미 뿌예진 시야를 훔쳐내지 못하고 강당 1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윤희가 옆에서 “해연아 왜 그래.” 했다. 고등 3년을 내내 우리 모두의 유쾌를 담당했던 윤희였다. 그토록 신나는 성가통에 울어버리는 나 때문에 당황한 윤희와 친구들은 왜 우냐면서 어깨를 토닥이다가 갑자기 웃고 우는 나를 보며 끝내 실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게 웃겨서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그쳤다.


그때 눈물이 동이 났는지 정작 진짜 졸업식 땐 울지 않았다. 그날 나는 너무 좋아서 울었고, 이 좋은 날들이 이제 완전히 우리 것에 된 것 같은데 우리는 이제 다른 길로 갈 것이고, 이 좋은 것들도 끝일 걸 알게 되서 울었다. 그렇게 무섭다던 고삼이고, 그렇게 좋다던 스무 살이라던데 나는 이놈의 고삼이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울었다. 여기에 그냥 머물고 싶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들어가는 집이, 함께 풀고 쌓여가는 문제집들이, 영어듣기시간에 몰래 나가서 먹는 순대꼬치가, 그 순대꼬치를 먹다가 발견한 선생님 무리에 놀라 학교 담벼락 뒤에 숨어서 킥킥대던 우리가, 때가 되면 종쳐주는 학교가, 성스러움이라고는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미친 성가가, 지루한 교장말씀은 싫지 않냐 며, ‘사랑합니다. 한마디로 끝내주시던 교장 수녀님의 목소리가 그리울 것이었다.


지금 보니 19세가 리즈로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유엔 스무 살이 모두가 말하는 미지만큼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탓도 있었다. 스물도, 스물일곱도 한참 지난 지금이 서른일곱인 것처럼. 무서운 고삼도 결국에 마주한 것처럼 미지의 스무 살도 내게 와 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대략 스물넷까지 19세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놈의 19살, 고삼 타령이 잠잠해진 것은 놀랍게도 지금의 남편을 남자친구로 만났을 때 였다.


나는 정말 내 두 눈을 팔라면 팔고 이내 뽑아도 줄 기세로 이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는데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19세 타령을 잠잠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내게, 시간이 유독 머물러 있는 딱 두 구간을 떠올리라면 19세, 결혼 무렵의 28세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서도 낭만 유지가 됐던 임신기간까지는 잊을만하면, 19세가 아닌 ‘우리 만나서 연애만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결혼해서 이렇게 애기까지 만들었지? 진짜 신기해.’ 라는 연애결혼 레파토리를 정말 많이 꺼냈다. 그렇게 미친 19세도 잊어 가는 듯 했다.


그러다 타령자체를 꺼낼 틈도 없이 살고 있었다는 걸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을 코앞에 두고 알아차렸다. 아이는 정작 졸업식 때 해야 하는 공연연습이 많다고 기대하고 졸업하고 나면 방학이라고 좋아하는데, 걔보다 서른이나 더 많이 산 어른 엄마가 유난이 풍년이다. 큰일이다. 이쯤이면 19세 해연이도 그만하면 됐다고 할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네, 기특해’ 할 것 같다. 그리고 유치원 졸업은 아무래도 니 아들이 아니라 니가 하냐. 다가, 울다가 웃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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