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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봅 Feb 29. 2020

피아노 치는 즐거움

 아주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기어코 나는 그것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어디 그뿐인가? 결혼 전까지 피아노 학원 운영도 해 보고 다수의 연주회도 열어보고, 개인 레슨에 온갖 반주... 피아노로 할 수 있는 밥벌이는 대충 다 해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피아노라는 악기를 전공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나와 비슷한 길을 걷는다. 누군가를 가르치게 될 것이고, 무대 위를 올라갈 것이며 반주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러나 지금 난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아주 즐거운 취미생활이 됐다.


 이쯤 되면 항상 궁금해하는 이야기가 있다. 피아노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을 때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밥벌이로 하는 지금, 어느 쪽이 더 만족스러울까?


 사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피아노를 온전히 취미로만 즐기고 있는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하지만 피아노로 밥벌이를 하는 게 적성에 안 맞는다거나, 싫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때에도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다.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었고, 주된 수입원이던 '레슨'또한 적성에 잘 맞았다. 미취학 아동부터 최대 60대 성인까지도 나의 레슨 대상이었는데 나는 '가르침'이라는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좋아했다. 그래서 적어도 그때를 후회하지 않고, 그때 나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사람들에게 성의 없거나 부족한 레슨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피아노로 밥벌이를 하지 않고 그저 취미로만 치는 피아노가 더 즐겁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밥벌이를 하다 보면 '취미'로 피아노를 즐길 수가 없어진다. 아니, 즐길 수는 있지만 현저히 그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루 종일 피아노로 '일'을 하다 보면 남는 시간에 굳이 피아노를 치고 싶어 지지가 않는다.


 처음 피아노를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전혀 피아노를 치지 않았었다. 출근하면 일을 하고, 퇴근하면 그냥 쉬었다. tv볼 시간은 있어도 피아노는 치지 않았다. 작정하고 안 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멀어져 갔다. 사실 그때는 결혼을 몇 개월 앞둔 시점이라 피아노 말고도 신경 쓸 일이 워낙 많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피아노와 멀어져 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철들기 전부터 피아노를  쳐 왔고,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를 사랑했다. 그래서 1년여 되는 기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미있는 건 하루 종일 피아노를 끼고 살 때보다 그렇게 오랜 시간 피아노를 치지 않자 오히려 점점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마음이 쌓여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쳐다도 보지도 않던, 그래서 결혼 후 신혼집으로 가져오지도 않았던 내 피아노를 최근에서야 다시 집에 들였다.


 오랜만에 치는 건반은 묘했다. 오랜 시간 치지 않아 제대로 칠 수 있는 곡도 없으면서 그 앞에서 오랫동안 뚱땅뚱땅거렸다. 생각보다 손가락은 많이 굳어 있었고, 예전에 쉽게 쳤던 곡들은 악보를 읽는 것조차 까마득 해 졌다. 그나마 평생을 쳐 온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며칠을 치다 보니 어렴풋이 감이 되살아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피아노 앞에만 가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재미있다. 피아노를 치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낀다. 아, 그래. 어릴 적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에는 종종 이렇게 즐거워하며 피아노를 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이제야 겨우 피아노를 가볍게 마주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마주 해 오던 피아노는 마냥 가볍게 즐길 거리가 될 수 없었는데 밥벌이에서 멀어지자, 그리고 스스로 묶여있던 '잘 쳐야 한다'는 강박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나는 피아노를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전공자이지만,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취미가 피아노를 치는 일이라고. 그게 아주 즐겁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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