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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민 ASM Nov 25. 2022

27. 초여름 (1951)

여름이 시작되는 뜨겁고 습한 공기 속의 일상적 가족 이야기

감독. 오즈 야스지로

출연. 하라 세츠코, 류 치슈, 미야케 쿠니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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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꽤 특별하다. 한창 영화를 많이 보던 2019년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에 영화를 검색하다가  반듯하고 깔끔한 색채의 일본 영화 이미지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보았던 어떤 영화들 보다도 이 영화만큼 강력하게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 없었고, 그렇게 영화 <안녕하세요>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처음 만났다.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그의 영화는 감상하면 할수록 인간상의 본질을 따뜻하게 건드리며 감상 후에는 늘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에겐 일종의 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자극적인 화면이 난무한 오늘날의 여러 영화와는 달리 느긋함 속 온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 색다르기도 했다. 한창 그의 작품을 몰아 보던 시기를 지나 1년 반 만에 <초여름>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감독을 만나게 되었고, 예전의 기억이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감상하였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특징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혼기가 찬 여자 주인공의 결혼에 관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 영화 또한 28살 노리코를 시집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다. 사실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많다. 아무래도 70년 전 영화이다 보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을 시기였고, 어른들의 태도에서도 전통적인 여성상을 고집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또한 요즘이야 28살이면 이제 막 결혼을 생각할 나이지만 그 당시에는 노쳐녀라고 불릴 정도로 결혼 적령기를 놓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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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제적인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기 삶에 관한 노리코의 주체적인 선택이다. 초반부터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가 집에 놀러 와 대뜸 노리코에게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부터 계속 주위 사람들에게 결혼에 관한 질문들로 시달리고, 심지어는 결혼 한 친구들과 비교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며 영화는 노리코에게 대놓고 결혼 준비를 할 것을 요구한다. 노리코는 직장 상사에게 번듯한 남자를 소개받지만 40살이라는 사실에 한 번 만나고는 마음을 접는다.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이웃의 한 남성과 결혼하게 된다. 집안사람들은 소개받은 남성에 대해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 같은 사실에 주목하여 처음에는 완벽한 결혼 상대라고 생각하여 후에 다른 결심을 한 노리코에게 꽤 섭섭함을 보이기도 하고, 노리코의 어머니는 남자의 나이를 듣고 반대하지만, 오빠는 나이가 뭐가 대수라며 어머니를 몰아붙이는 등 가족들 내에서도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상황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부모가 보이는 태도는 딸에게 못내 아쉬워하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고 부부끼리 심경을 토로하는 정도에서 마무리된다. 딸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영화는 그녀의 결혼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즈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어긋남이 없는 행동을 한다. 아이들은 아이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친구들은 친구다운 내가 상상한 전형적인 인물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화면 구성의 특징과 함께 틀에 갖힌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감독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을 위해 짜인 최적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공통으로 공유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담아 어른들의 심각한 이야기에 이입하여 감상하다가도 아이들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에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도 두 남자아이의 철이 없는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주인공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가벼우면서도 깊이있게 담아낸 점이 탁월하다고 느꼈다. 미혼과 기혼 친구들 사이의 대화를 통한 미묘한 신경전이나 노년이 된 노리코의 부모가 인생을 돌아보는 모습, 올케가 노리코에게 결혼에 관해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한 장면 등이 떠오른다. 특히 하늘에 떠가는 풍선을 보며 노부부가 풍선을 놓친 아이가 울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전쟁통에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있다는 배경과 함께 노리코와 함께 사는 현재가 자신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그녀가 떠나는 것이 큰 슬픔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자식들이 부모의 품에서 모두 떠나가는 것을 풍선에 비유한 것이 감동적이었다. 장면 하나하나에 인물에게 이입할 수 있는 요소를 부여하여 극이 더욱더 풍성해지면서도 과하지 않은 연출로 긴 여운을 남기는 효과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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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감독은 등장인물이 감정을 털어놓게는 하지만 관조하는 듯한 카메라 시선으로 절대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는다. 갈등 장면에서도 흔한 배경음악 하나 없이 인물 간의 대화를 담담하게 담아내며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이는 영화 속의 캐릭터들에게도 능동성을 부여하는 듯 보였고 순리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말미에 노리코가 한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아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그 아이를 잘 키우는 모습에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일반 사람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사랑에 대한 그녀만의 확고한 가치관이 돋보였다. 영화는 불꽃 튀는 격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화의 분위기처럼 잔잔하게 스며드는 사랑을 언급하려고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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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평온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다. 약간은 틀에 박힌 내용이지만 재치 있는 설정으로 오로지 분위기에 심취할 수 있게 되는 점도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익숙해진 배우 하라 세츠코와 류 치슈는 언제나처럼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든 연기를 보여준다. 오즈 감독 영화의 스토리가 비슷하듯 배우의 구성도 비슷하여 영화마다 이번에는 저 배우가 어떤 캐릭터를 맡게 될까를 궁금해하며 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고, 이러한 점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오랜만에 본 오즈 감독의 영화지만 예전에 느꼈던 그 분위기를 온전히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앞으로도 꾸준히 챙겨 볼 감독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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