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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승민 ASM Jun 19. 2023

44. 가을 이야기 (1998)

에릭 로메르, 사계절 이야기 - 3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마리 리비에르, 베아트리스 로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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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연작 중 세 번째 작품인 <가을 이야기>는 <봄 이야기>와 같이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인간상의 전제 하에 사랑과 관련한 깊은 고찰을 보여준다.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포도밭을 운영하는 마갈리는 남편이 일찍 죽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중년 여성이다. 마갈리의 가장 친한 친구 이자벨과 아들의 여자친구 로진은 외로워하는 마갈리를 위해 각각 다른 남자를 소개하며 그녀에게 인위적인 인연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한다. 마갈리는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하다가 어느 새부터 관심을 갖게 되고, 이자벨의 딸의 결혼식에서 그 둘을 만난다. 마갈리에게 직접 자신의 철학 선생 에티엔를 소개한 로진과는 달리, 이자벨은 마갈리에게 남자 제라르의 정체를 알리지 않은 채 그녀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도록 계획했다. 결국 혼란스러운 감정에 우울해진 마갈리는 파티가 끝나고 이자벨과 대화하며 제라르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사실을 털어놓았고, 때마침 등장한 제라르와 대화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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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부분은 바로 색감이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에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으로, 가을 내음이 가득한 노랗고도 푸른 색채와 함께, 등장인물의 짙은 색채의 옷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름 이야기>에서는 강하고 채도 높은 색채로 뜨거운 감정을 표현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조금 더 농도 짙은 색감을 사용하여 여름 보다는 농익은 인물들의 감정을 나타냈다. 실제로 등장인물의 연령대 또한 20대 청년에서 40대의 중년으로 영화의 색채와 잘 어울리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또한 포도주를 활용한 스토리텔링도 마음에 들었다. 포도를 따는 귀찮은 작업을 거쳐서 세척 후 통에 포도를 담아 숙성하는 오랜 과정이 지난 후에 완성되는 포도주. 기후와 숙성 조건이 까다로워 약간의 변화만 주어도 그 맛과 품질이 천차만별인데, 영화는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듯 마갈리의 감정이 고조되는 과정을 진득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자벨과 로진의 행동에서 여러 고려할 요소들이 많았지만 오로지 그녀의 감정에 솔직하며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마갈리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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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사랑에 대한 등장인물의 다양한 태도와, 여러가지 형태가 등장한다. 특히 로진은 에티엔, 그리고 마갈리 아들의 관계에서도 일반적인 사랑으로 만남을 정의하지 않고 제각각 다른 형태를 추구한다. 로진은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한다. 실제로 마갈리 아들과 사귀고 있으면서도 철학 교수인 에티엔과 계속 만난다. 마갈리는 로진이 마음에 들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들에게 과분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여러가지 사랑을 추구하는 로진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에티엔은 로진과의 대화에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수이며, 이미 많은 여학생과 염문을 뿌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는 젊은 여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자벨과 제라르의 대화에서도 사랑에 대한 그들의 입장 차이가 보인다. 이자벨은 마갈리의 상대를 찾기 위해 신문 광고를 통해 제라르를 만나지만, 제라르는 그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마지막 만남 전까지 이자벨에게 관심을 보인다. 제자르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반면에 이자벨은 자신의 가정을 굳게 유지하는 안정적인 태도와 함께 타인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마갈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실한 사랑을 원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이러한 등장인물을 통해 사랑에 대한 입체적인 관점을 드러내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이끌어 내어 자연스럽게 어떠한 깨달음을 도출하도록 유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미디어에서의 사랑은 흥행을 위한 특정한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녀 관계에서의 고난, 혹은 남녀 관계 자체도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주변 현실에서는 분명 일반적인 형태의 사랑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각 캐릭터의 고유 성격을 통해 사랑을 주제로 다각도의 사유를 가능케 하는 영화의 태도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로진과 이자벨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상대방에게 마갈리와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솔직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 또한 다양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의 일부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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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언급할 점은 마갈리의 오해이다. 마갈리는 결혼식에서 내심 마음에 들었던 제라르가 방에서 이자벨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혼란스러워 한다. 사실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던 둘이었기에, 제라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차를 얻어 탄 마갈리에게 이자벨과의 상황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그가 말하는 내내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만 계속된다며 혼란스러워 하고, 이내 기차역에 내려 밤까지 벤치에서 고민에 잠긴다. 후에 이자벨의 숙소로 돌아온 마갈리는 그녀로부터 제라르에 대한 그동안의 해프닝을 알게 되고, 그제서야 자신의 솔직한 감정은 제라르에 대한 관심이었음을 인정한다. 사랑의 감정에 대해 조금은 즉흥적인 판단을 이어가던 영화 속 다른 등장인물과는 달리 끝까지 고민을 이어가며 진실함을 추구하는 마갈리의 진중한 태도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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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야기>의 카메라는 클로즈업 한 번 없이 객관적으로 인물들의 상황을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놀랍도록 차분한 분위기는 한편으로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당연한 듯하게 느껴지도록 하기도 한다. 다만 이로 인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각 인물의 캐릭터성과 감정이 머릿속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도록 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감정적인 존재인 사람을 다루는 영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의 행동을 바라보는 재미도 가득했다. 개인적으로는 사계절 이야기 연작 중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느낀다.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고민이라면 한 번쯤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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