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 사계절 이야기 - 4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샬롯 베리, 프레데리끄 반 덴 드리셰, 미쉘 볼레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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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이 영화는 4년 전 사계절 연작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감상했던 작품으로 이번에 다시 감상하기 전까지도 내용이 대부분 기억에 남아 있던,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겨울을 주제로 하는 영화 답게 배경은 파리와 그 근교 겨울의 차가운 색채가 잘 전달된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비슷하게 주인공과 여러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사랑의 단절과 우연성, 그리고 믿음에 대한 용기를 다루며 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 소박한 기적을 아름답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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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주인공 펠리시는 어느 여름 바닷가 마을에서 샤를르라는 남자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마치 <비포 선라이즈>의 두 남녀를 보는 듯, 며칠을 뜨겁게 보낸 그들. 샤를르는 파리로 돌아가는 펠리시의 기차 앞에서 급하게 그녀의 집 주소를 받아 적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그녀가 실수로 비슷한 지명의 다른 도시를 알려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5년 후 잠에서 깬 펠리시 곁에는 샤를르가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 그녀는 파리에서 미용사로 일하고 있으며, 샤를르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진 미혼모이다. 펠리시 주변에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남자들이 많다. 그녀가 일하는 미용실 사장인 맥상스는 이혼을 하면서 펠리시와 함께 느베르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그녀도 이에 동참한다. 펠리시는 동거 중인 로익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로익를 떠나 맥상스와 함꼐하려는 펠리시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느베르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확인한 후 펠리시와 맥상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러 대화를 주고받는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샤를르와 찍은 사진을 간직하며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펠리시는 맥상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언젠가 그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도해달라는 다소 이기적일 수 있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다시 파리로 돌아가 로익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그녀의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영화는 펠리시의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다른 요소들은 비교적 부수적으로 활용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영화 초반부터 어떤 장면이든 펠리시의 얼굴을 중점으로 화면 구성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의 집으로 잠시 돌아온 그녀는 짐을 챙기며 샤를르와의 사진을 보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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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느베르로 돌아간 후 맥상스와의 생활은 예전같지 않다. 특히 그가 친구를 불러 식탁에서 수다를 떨 동안 부엌에서 혼자 외롭게 닭 요리를 준비하는 펠리시를 대비시킨 장면에서 그녀의 쓸쓸한 감정이 잘 드러난다. 또한 거실에서 그녀의 아이가 이 집은 마당도 없고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불평을 듣기도 한다. 그녀를 놀아주려 밖으로 나간 펠리시는 어느 성당에 들어가게 된다. 웅장하고 성스러운 공간에 사람 한 명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앉은 펠리시는 한참 동안 정면을 응시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듯 밖으로 나선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인물 심경 변화의 원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마치 <비브르 사 비>에서 영화를 보는 안나 카리나의 모습을 재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에 잠긴 펠리시의 미묘한 표정을 롱 테이크로 담아내어 효과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믿음이다. 이전에 로익을 찾아갔을 때 그는 친구들과 함께 전생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 때 펠리시는 전생을 믿는다고 답했다. 또한 성당에서의 경험 이후 맥상스를 떠난 펠리시는 다시 로익과 함께 하는데, 그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연극 ‘겨울이야기’를 관람하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눈물을 흘린다. 연극 관람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펠리시와 로익은 믿음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그녀는 성당에서 느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세상에는 나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5년 전 샤를르와의 경험과 성당에서의 경험이 놀랍도록 똑같았다고 주장한다. 로익은 여기서 파스칼을 인용한다. 철학자 파스칼의 ‘파스칼의 내기’는 신을 믿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 이득이 없지만 신이 있으면 천국에 가지만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신이 없으면 아무 이득도 없고 신이 있으면 지옥에 간다는 전제 하에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 신을 믿는 것이 낫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펠리시는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샤를르의 존재에 대해 영화 초반부터 끊임없이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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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퀀스에서 버스에 탄 펠리시와 아이는 맞은편에 어떤 여자와 앉아 있는 샤를르를 알아본다. 둘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지만 어딘가 불안안 표정의 펠리시는 다음 정류장에서 바로 버스에서 내린다. 샤를르는 그런 그녀를 따라 내리며 자신을 회피하는 펠리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펠리시는 그와 함께 있던 여자를 아내로 오해하고 있었고, 오해를 푼 펠리시는 예전에 자신이 주소를 잘못 알려줬음을 사과한다. 그리고 아이가 샤를르의 아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후 그들은 서로를 얼싸 앉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결말에서 아이가 펠리시와 샤를르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소파에서 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왜 우느냐고 묻자 아이는 행복해서 운다는 아름다운 답변을 남긴다.
<겨울 이야기>는 로메르 감독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사랑에 관한 비겁한 술수나 계략이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펠로시의 진실된 사랑에 대한 믿음만을 굳건히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주소를 노트에 옮겨 적는, 지금 보면 상당한 아날로그적 낭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어긋난 둘이 버스에서 다시 재회하는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는 영화 내내 서서히 그녀의 감정에 이입하여 끝난 후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하도록 만드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사계절 연작의 다른 작품보다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것 같아 아쉬움이 있지만, 적어도 나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인류애의 따뜻함이 돋보이던 인상깊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사계절 이야기 연작을 행복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