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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참 잘 살았다
by
혜은
Sep 9. 2021
그런 날이 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날. 스스로가 대견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미소가 지어지는 날. 나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초6 남학생들 중에 특이한 학생이 하나 있다. 편의상 A라고 하겠다. 6개월쯤 전에 내가 처음 지금의 학원에 왔을 때, 나는 A가 문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6학년 반의 반장이라고는 하는데, 집중력이 5분을 넘기질 못하고 쉴 새 없이 쓸 데 없는 말을 했다. 여학생들이 시끄럽다고 해도 5분이면 다시 시끄러워지고, 심지어는 내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쳐도 5분이면 다시 원래 상태였다.
A만 없으면 6학년 수업은 적막했다. 다른 6학년 학생들은 A가 없어서 조용한 거라며, A가 영어 외의 다른 수업들에서도 너무 시끄럽다고 나한테 하소연을 했다.
처음에 나는 A를 어떻게 '제압'할 지만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정색을 하고 A를 혼냈다. 한, 두번은 그게 먹혔다. 시간이 지나자 A는 내가 본인을 혼낼 타이밍쯤 되면 조용한 척을 했다. 그 정도로 A는 눈치가 빨랐다.
두 달이 지났을 때, 나는 A와 '타협'을 했다.
A는 창의적인 아이였다. 독특한 그림들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A와 약속했다. 수업 시간 내내 조용히 하면, 수업 마치기 10분 전에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해주겠다고. A와 아이들은 그 제안을 좋아했다.
이 약속이 2주쯤 갔을까. A는 약속을 어겼다. 어느새 한 번 떠들기 시작하더니, 이때까지 참았던 걸 터뜨리 듯 말을 쏟아냈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A가 미웠다.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A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금의 나는 A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수업이 시작하고 단어 테스트를 치는 15~20분 정도의 시간에 조잘대는 A의 앞에 서서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A와 대화를 나눈다.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에게 관심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A의 내면의 욕구가 나와의 대화에서 채워지자, A는 비로소 수업 시간에 조용해지는 구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영어 독해 설명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A에게 질문을 던진다. A가 대답을 곧잘 하면, 학생들 앞에서 크게 칭찬을 해준다. A는 그때마다 입이 귀에 걸려서 얘기한다.
"역시 나야~ 이게 나지~"
'귀엽다'.
나는 요새 A가 귀엽다. 다른 학생들이 단어 테스트를 준비하는 시간에, A는 재빨리 단어를 외우고 나에게 묻는다.
"선생님, 저 오늘 뭐 그릴까요?"
곰곰히 생각해서 주제를 던져주면, 세상 진지하게 그림을 그린다. 나는 A가 조금이라도 잘 그린 부분이 있으면 칭찬해주고, 그림을 너무 못 그렸을 때는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지 제시해준다. A는 이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내게 그게 느껴진다.
오늘 수업이 마칠 때쯤 6학년 여학생 중 하나가 "우리 이제 반장 바꿀까요?"라고 했다. 순간 A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내게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반장인 자신을 내심 자랑스럽게 여기는 A를 알기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왜? 나는 A가 반장인 게 좋은데?"
아이들이 의외라는 듯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A는 귀여우니까!"
다들 내게 야유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봤다. 씨익 웃고 있는 A를. 그리고 당당하게 학생들에게 차렷, 경례를 하더니 다른 학생들이 나갈 때 내게 와서 묻는다.
"선생님, 저 오늘 인사 잘했죠?"
그래서 정말 잘했다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라고 얘기해줬다. 씩씩하게 나가는 A를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스스로 생각했다.
'나 오늘 참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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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너무 예쁜 영어 학원 원장입니다. 생각 정리를 할 때마다 노트에 글을 써내려 갑니다. 글을 멋있게 쓰진 못해도, 자주, 꾸준히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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