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가치

인생을 저금하는 방법

by 쏘버



태어나 처음 해보는 장기 여행이었다. 어딜 가도 신기했고, 뭐만 봐도 사진을 찍으며 의미를 부여했던 더블린 생활은 곧 일상이 되었다. 거리 이름을 살피는 대신 발길을 멈추면 익숙한 버스 정류장이, 안내판을 살피지 않아도 타야 할 버스가, 안내방송을 듣지 않아도 내릴 곳이 되면 저절로 몸이 튀어 나갔다. 샛노란 이층 버스를 타면 늘 위층 맨 앞자리에 앉아 뻥 뚫린 창으로 사진을 찍어대던 나는 사라지고, 오늘은 뭘 먹지 하는 생각만 떠올랐다. 그토록 바라던 새로운 생활은 새 반지나 새 핸드폰을 샀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내 손에 들어오자 반짝이던 빛은 금세 바랬고 가치가 사라져 버린듯 했다.


어디든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신기함은 사라지고 밋밋한 생활 터전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모든 것이 경이롭던 도시가 그저 무미한 공간이 되자 나는 4주마다 방값 내는 날이 오면 마음이 한 뼘씩 좁아졌다. Tasa Miran이 우리 집처럼 편해졌고, 꽃이 가득한 따사로운 정원은 이미 평생을 산 것처럼 평범해졌지만 집세를 내는 날에는 차디찬 섬나라에 사는 이 답게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훅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면 방값을 걱정하기는 커녕 냉장고를 열면 늘 먹을 게 있는 한국 집이 그리웠다. 초조해졌다. 어떻게 시작한 새로운 생활인데, 이게 뭐야!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는 훗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일랜드를 더 즐겼어야 했다고 하고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어느 날은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오는대로 버스를 막 올라탔는데 알고 보니 30분은 족히 돌아서 가는 노선이었다. 내려서 직행 버스를 탄다면 25분 후에 있었다. 이걸 타고 돌아 가나 기다려 그 버스를 타나 도착 시간은 비슷했다.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엉덩이를 놓았다. 이것뿐 아니었다. 배차 간격이 족히 십여 분은 되는 버스는 툭하면 사라지는 일도 잦아 짜증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분초를 다투어 오던 서울의 버스가 그리웠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말했다. 2층 버스 사진만 봐도 너무 새롭고 대리만족이 된다고, 유럽에 있는 네가 부럽다고! 물론 나도 백 퍼센트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실제로 내가 깬 예금과 용기를 생각한다면 행복해야 할 상태라는 걸 잘 알았다. 친구들아, 인스타그램에 있는 사진이 전부 진실은 아니란 걸 너희도 알잖아. 라고 생각하며 함께 이어폰을 꽂고 차창 너머를 보았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해가 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를 닮는지 사방으로 튀는 내 마음이 오늘은 집에 한 번 걸어가 볼까 싶어졌다. 버스를 타고 가건, 집에 걸어가건, 꼭 맞춰 가야 할 필가 없었다. 많이 걷는다고 해서 내일 별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 내린 유럽 거리를 하염없이 걸을 일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서울에서는 대중교통이 조금이라도 밀리면 아까운 시간을 길에서 날렸다고 인상을 쓰며 애꿎은 버스 앱만 두드리곤 했지만, 여기에선 그럴 일이 없었다. 나는 길바닥에 시간을 뿌리기로 결심했다.


장기 여행의 좋은 점은 어딘가로 갈 때 시간에 대한 초조감이 없다는 것이다. 월요일에 못 가면 화요일에 가면 되는 것이고, 수요일에 문을 닫으면 다음 날 가면 된다. 썬베어 젤라또 가게는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후 4시부터 문을 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화요일에 열기도 하고 아예 안 여는 날도 허다했다. 죽어도 오늘 꼭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몇 시까지 가지 않으면 딱히 큰일이 나지도 않는다. 어딘가로 가려고 모든 경로와 수단을 비교하며 최적 루트를 찾지 않아도 되고, 돌고 돌아 가더라도 우연히 좋은 것을 찾아볼 행운을 즐기면서, 계속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 여행하는 하루가 더 이상 빛을 내지 않는다고 그저 허비하기엔 아까우니 나는 스스로 광을 내기로 했다. 차곡차곡 저금한 시간을 안고 서울로 돌아가면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질 것 같았다.



download (1).jpeg


70센트 더 비쌌던 피스타치오 맛이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