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간판

만약에 김치를 먹었더라면

by 쏘버


유학 생활 중 어학원 다음으로 발길이 많이 향한 곳은 아시안 마켓이었다. 더블린 중심지에 있는 어학원 근처에 있어서 숱하게 드나들었다. 노란색 간판으로 유독 눈에 띄는 그곳은 밖에서 보면 작은 구멍가게 인 것 같았지만 내부는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규모도 크고 취급하는 물건도 많았다. 왠만한 한국 음식은 다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음식 중 떡볶이를 가장 좋아했다. 특히 한달에 한 번 오는 그 날에는 꼭 먹었다. 생리를 앞두고 어김없이 떡볶이를 찾아 아시안 마켓을 찾았던 날이었다. 스멀스멀 아파오는 허리에 얼른 필요한 것만 사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보통은 한가하던 한국 식품 코너가 그날따라 외국인들로 붐볐다. 뒤에서 허리를 부여잡고 오분 쯤 기다렸을까, 좀처럼 빈 자리가 나지 않아 괜히 라면 코너로 돌아보려던 찰나 앞의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이 떡볶이는 조금 맵지만 김치와 같이 먹으면 맛있어. 내 눈길이 자연스럽게 외국인 둘에게 쏠렸다. 통조림 김치를 집어드는 모습에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김치 좋아하니?


사실 나는 김치를 먹지 않는다. 해외에 살러 간다고 했을 때 엄마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김치 걱정은 없겠네, 였다. 김치를 안 먹을 뿐 아니라 편식은 나의 오랜 친구다. 어린 시절 나는 야채가 입에 닿기만 하면 죄 뱉어내곤 했었다. 동그랑땡에 들어간 작은 야채까지 샅샅이 골라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깐깐한 나의 입에 오직 야채로만 이루어진 김치는 감히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 엄마는 나를 골고루 먹이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전쟁을 치렀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 김치볶음밥이 올라왔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떠오를 정도로 새빨갰던 김치볶음밥. 맛있는 햄도, 노른자가 살아있는 계란후라이도 없었던 순도 100% 김치볶음밥. 나는 가족이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밥을 싹 다 먹을 때 까지 식탁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불이 꺼진 부엌에 나와 밥그릇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는 마지못해 숟가락을 쥐고는 잘게 조각난 김치 대신 형태가 잘 보이는 밥알을 하나하나 가려냈다. 결말은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 큰 지금도 김치만큼은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일은 나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 내가 말을 걸게 만든 통조림 김치의 존재. 이날만은 내가 한국인의 대표로서 통조림 김치를 집어 드는 외국인을 바른길로 인도해야겠다, 김치의 나라 출신으로서 자부심이 불쑥 솟았다. 낯선 사람이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자, 두 사람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여기는 아시안 마트, 한국 코너, 그리고 누가 봐도 동양인이 말을 건 것이어서 금방 경계를 풀었다. 이어지는 나의 질문은 둘을 놀라게 했다. 너희 혹시 프레쉬 김치는 안 좋아하니?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라는 틱톡에서 한국 음식에 대한 콘텐츠를 봤다고 했다. 그 후 아시안 마켓에 와서 한글이 씌여진 음식에 도전하고 있는데, 요즘에는 김치에 빠져 매일 다른 음식과 곁들여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프레쉬 김치의 존재는 처음 들어봤다며 눈을 반짝였다. 나는 못내 안타까워 하며 곧장 라라를 데리고 신선식품 코너로 향했다.

예상대로 신선식품 코너는 한국에서 수입해 온 김치가 있었다. 아니,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포기김치, 볶음김치, 총각김치, 열무김치, 깍두기까지 종류별로 줄을 지어져 있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이만 떡볶이 코너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이 나를 가로막았다. 맛김치와 포기김치 차이가 뭐야? 나는 아직도 답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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