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결산

생존기

by 왜살지

또 한 주를 버텼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끔찍했다. 사서 선생 급여 이슈가 있었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목요일부터는 괜찮았다. 목요일에는 감사 교육이 있었고 금요일은 금요일이라 버틸만 했다. 수요일에는 애인을 만났다. 같이 아웃닭에 갔다. 사귀기 전에 학교 근처의 아웃닭에 갔던 일을 추억했다. 그녀는 창백했고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노란 조명 아래로 해사한 웃음이 반짝였다. 그녀는 나보다 내 옆에 앉은 남자와 더 많이 말했다. 나는 초조했지만 그녀가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음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무 걱정도 없었고 나는 그녀와 집을 같이 가게 될 것임을 알았다. 우리는 그때 친해지면 될 것이었다. 매장에서는 카스 블룸의 노래가 나왔다. 나는 왠지 그녀와 사귀게 될 것 같았다.

이번주에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저번주 일요일부터 헤밍웨이 단편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다. 헤밍웨이는 적게 말했고, 말하는 것보다 적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더 많이 상상하게 했다. 최소한의 낱말들이 여백을 최대화했다. 압축된 단어들은 이상하게 무거워지지 않았다.

3월 초반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읽었다. 끔찍하게 어려웠다. 철학과 중퇴자임이 서러웠다. 복잡한 논리학 기호가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었다. 책에는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사실들은 대상들과 논리적 관계를 맺는다고 적혀 있었다. 논리적 관계를 맺지 않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에는 존재한다는 말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은 상(image?)으로 본떠지고 사태로 파악되고 명제로 분석되어 사실로 판명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명료하다. 내 언어의 한계가 바로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동어반복과 유아론을 피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내 이해의 한계였다.


3월 중반에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읽었다. 주인공은 곤충 채집이 취미인 학교 선생이었다. 그는 모래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러 사구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마을 인심에 빌어 하루 잠자리를 얻었는데, 그곳에서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 집은 모래 구덩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꺼내줘야만 탈출할 수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꺼내주지 않았다. 그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매일 모래를 파서 구덩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만 밀려오는 모래로부터 마을 전체가 안전할 수 있었다.

상징이 명확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치밀했고 날카로웠다. 모래는 인간이 처한 노동의 운명, 자본과 권력이 가진 무형의 힘, 세월, 자연, 허무였다. 세월은 이 책의 페이지들도 바래게 할 것이었다. 그렇게 황색이 된 페이지들 사이에서 이따금 모래 바람이 불어 올 것이고, 나는 이 책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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