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대학교 1학년 2학기 독일 철학 수업시간이었다. 강의실로 들어온 연로한 교수는 여느 때와 달리 몹시 화가 나 보였다. 가타부타 인사도 없이 칠판에 강렬한 구호를 큼지막하게 썼다. '붉은 무리 몰아내고 철인 왕국 이룩하자!' 그러고는 혼자 큰 소리로 구호를 읽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라고 했다. 우리가 대학물을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순수한 1학년이었다. 어느 누구도 교수의 느닷없는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우리보다 서너 살은 많은 복학생이었다. 그는 붉은 무리가 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교수가 그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그는 거침없이 교수를 향해 나갔다. 교수가 그의 빨간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이게 붉은 무리다."라고 했다. 하필 그는 왜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을까.
그래도 당시엔 교수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지키던 시대였다. 복학생은 티셔츠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강의실을 나갔다. 교수는 괘씸하다며 복학생의 이름을 우리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출석부에서 기어이 복학생의 이름을 찾아내어 체크를 했다. 그리고 얼른 앞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라고 다그쳤다.
몇 명의 학생이 쭈뼛거리며 나가 구호를 외쳤다. 목소리가 작으면 교수는 다시 하라고 했다. 붉은 무리를 몰아내자더니 빨갱이들의 당원대회가 이보다 살벌할까.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교수님의 강요에 따를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구호를 바보처럼 외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하지만 내 몸은 생각과 달리 움직였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교수가 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내 이름을 물었다. A+를 주겠다고 했다. (이름도 크게 말했다.)
그날 이후 교수는 휴강을 거듭했고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학교에서 잘렸다는 소문도 들렸고 외국 어디론가 안식년을 갔다는 말도 있었다. 우리는 교수가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너무 연구를 열심히 해서 미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미치지 말자고, 공부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과목에서 A+를 받지 못했다. 찾아가 따질 교수가 없었다. A+ 준다는 교수도 미쳤지만 그 말을 믿은 나도 미쳤다.
이듬해 2월 나는 입대해 전방에서 붉은 무리와 대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