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미안했다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by 구론산바몬드

어느 중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여자 원어민 영어보조교사와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학생 한 명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원어민은 들고 있던 교과서를 집어던지고 교실을 나갔다.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걸 간신히 말렸다. 학생은 장난으로 그랬겠지만 그녀의 반응은 분노를 넘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극한의 감정까지 갔다. 그 학생은 영어로 세 장의 반성문을 쓰고서야 겨우 용서를 받았다. 물론 구글 번역기의 도움이 있었다.


가운뎃손가락이 언제부터 극악무도한 욕설 행위가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데 어떤 것은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중 그래도 가장 그럴듯한 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5세기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영국군의 주력은 궁수였는데, 그 화살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 프랑스군의 갑옷을 뚫을 정도였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영국 포로를 잡으면 활을 쏠 수 없도록 손가락을 잘랐다. 프랑스군의 만행에 치를 떤 영국군은 전투에서 승리할 때면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검지와 중지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는데, 이는 손가락이 잘리지 않았다, 즉 승리했다는 조롱 섞인 표현이었다. 때론 검지를 내리고 중지만 들어 보이기도 했는데 역시 모욕을 주려는 의도는 같았다.

[출처: '널 위한 문화예술'님의 블로그]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운뎃손가락이 욕설로 통하지만 본디 서양에 국한된 문화였을 것이다. 그런 문화는 아마도 해방 후 햄버거와 함께 우리나라로 건너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나는 가끔 가운뎃손가락을 욕설이 아닌 일반 수신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가령 수업 시간에 화장실이 급한 학생이 있으면 가운뎃손가락을 든다. 그러면 나도 역시 가운뎃손가락으로 답을 한다. 손가락을 위로 들면 긍정의 의미, 아래를 향하게 들면 부정의 의미인 것으로 약속이 되어 있다. 출근 시간에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걸어가는 학생들이 보인다. 태워주기를 원하는 학생은 역시나 가운뎃손가락을 들면 된다. 내가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들면 타라는 의미, 아래로 내려 들면 타지 말라는 의미다. 그냥 재미로 그랬다. 학생들은 약간 상식을 벗어나는 교사의 언행에 동질감과 경외심을 보인다.


어느 날 출근을 하고 있는데 한 녀석이 내 차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 나는 그걸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하필 걸어서 출근을 하던 인성부장 선생님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인성부실에 불려 간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와의 약속된 수신호였음을 아무리 항변해도 인성부장 선생님은 믿어주지 않았다. 학생의 반복된 주장에 인성부장 선생님이 나에게 확인차 전화를 했다. 그런 일 없다고 답했다. 그날 그 녀석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런 약속을 한 것도, 인성부장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도 모두 장난이었다. 어쨌든 그땐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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