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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취 Oct 13. 2021

하지 않은 말

투어 가이드가 되어 다양한 나라를 친구들에게 발표하자


 사회 1단원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국어 수업의 주제도 ‘매체를 이용하여 발표하기’였기에 둘을 통합하여 직접 흥미 있는 나라를 조사하여 친구들에게 발표하기로 했다. 먼저 관심 있는 나라별로 모둠을 나눴다. “선생님 저는 독일에 대해 발표하고 싶어요. 독일은 유대인 학살과 관련하여 제대로 진상 조사하고 사과를 하잖아요. 일본과는 달라요. 그래서 나중에 독일에 있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가보고 싶어요. ”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똑똑이가 말했다. “저는 프랑스 가보고 싶어요. ” 가장 인기 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무려 5명의 선택을 받았다. 모두 에펠탑의 영향이었다. 몇 명은 2순위 국가를 선택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프랑스의 마카롱, 바게트 등 음식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문득 어렸을 때 세계 다양한 나라에 대해 소개한 한 책을 끼고 살던 게 떠올랐다. 88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호돌이가 방방 곳곳 돌아다니며 탐험하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만화책이었다. 보고 또 봤다. 자연스레 내용이 달달 외워졌다. 책을 보며 관심이 생긴 나라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인도였다. 인도에는 죽은 아내를 위해 22년간 만들었다는 무덤이 있다. 하얀 성벽 때문에 해의 위치에 따라 색깔이 달라 보인다는 타지마할. 역사 속에서 본 왕들은 왕비가 죽으면 더 어린 왕비를 두던데 이와 다른 ‘샤 자한’의 순애보적 사랑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책에 나온 궁전의 모습도 굉장히 신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시험 기간에 종종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갔다. 열람실에 앉아 교과서를 보면 왜 이리 졸린지. 졸린 눈을 부여잡고 교과서를 읽다 지겨워질 때쯤 바람을 쐬러 나왔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도서관 구석구석이 궁금해졌다. 지하에는 매점이 있었고, 2층에는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외부로 연결된 지하 1층에는 책을 볼 수 있는 자료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래 묵은 책 냄새가 났다. 꿉꿉하지만 싫지 않은 냄새. 서가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책을 골랐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류시화 작가의 인도 여행기였다. 시험이 며칠 안 남았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작가와 함께 별들이 가득 보이는 초원에 한참 동안 누워있었다. 역시 인도를 가봐야겠어.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바깥은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1층에 헐레벌떡 올라와 공부하지 않은 책들을 가방에 꾸역꾸역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딴짓만 하다 집에 가는구나. 등에 맨 가방만큼 발걸음도 무거웠다.      




 아이들의 발표가 끝났다. 모든 내용을 다 듣고 나서 가장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나라에 투표를 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나라는 ‘아이슬란드’였다. 오로라를 보고 온천인 블루라군에 가서 몸은 푹 녹이고 싶다고 했다. 2위는 독일,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 디즈니 성의 모델로 알려진 노이슈타인 성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밖에 마블 캐릭터들을 볼 수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위치한 미국, 죽은 자의 날에 하는 해골 분장을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멕시코가 선택되었다.      




 이십 년이 지나고 그 시절 가고 싶던 인도에 나는 갔을까? 이십 대에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고 혼자 여행하는 자유로움에 푹 빠져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일상이 해야 할 것의 연속이라면, 여행은 하고 싶은 것의 연속이었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르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가벼움에 열광했고 낯선 풍경은 경이로웠다. “인도 진짜 더러워, 갠지스강은 똥물이야. 그걸로 씻고 옷도 빨고 다 해” “여자 혼자 인도는 진짜 위험해. 음료수에 약 타서 준대. 그리고 성폭행한대. 조심해야 돼”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은 뽀얗게 먼지가 쌓인 채 잊혔고, 인도 여행에 대한 부정적인 카더라만 들려왔다. 비행기표도 비싼데 좋지 않다는 곳을 갈 이유가 없었다. 인도는 가지 않았다.      




 학생들의 소감을 나눴다. 수업 후 느낀점 정말 다양했다. '발표 때문에 학교 오기가 싫었는데 해보니까 생각보다 별 거 아니였다' 학생부터 만리장성이 20000km나 된다는 걸 알게 돼서 유익했다는 학생도 있었다. 발표 준비가 참 번거롭다는 걸 알게 됐다는 솔직한 평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성인이 되어 알바를 하고 돈을 모아 혼자 여행을 다닌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규칙, 질서, 문화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직접 경험하길 원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다름’ 속에서 인정과 존중을 배우길 바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가고 싶던 인도를 아직 가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꾸던 꿈을 놓아버린 어른은 멋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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