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년 전...
나는 은행 경비원이었다. 그리고 난 그 직업을 나름 좋아했다. 고객에게 친절하게 인사하고 번호표를 뽑아주고 안내를 잘하면 허리힘을 쓰지 않고도 달에 목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월급을 탔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비원 생활에 나는 안주하고 안주했다. 더 구체적인 미래를 위해 계획이나 노력 같은 것은 묻어두고 하루하루 안주하며 살았다. 최저 시급이 오르니 한 해만 지나면 급여는 소량이지만 알아서 오르곤 했다. 그렇게 한 지점에서 6년이 시간이 흐른 후, 나는 큰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평소 락(Rock)이 지지 않는 나라로 유명한 영국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간은 총 10일간이었고 여행지는 잉글랜드 런던부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까지 유랑을 하고 돌아올 셈이었다. 나는 민주시민이기 때문에 대통령선거가 휴가와 겹친 이유로 투표를 미리 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아시아 밖을 처음으로 벗어나 보는 것이라 굉장히 설렜다.
항공편은 아시아나였고 기종은 비교적 낡았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설레는 마음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승무원분들이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분들이라 번따를 하고 싶었지만 유튜브에서 본 바에 의하면 그분들은 사회적 지위를 상당히 고려해서 남자를 만나기 때문에 은행 경비원인 내가 번호를 물어봤다가는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할 수 있는 우려가 있어서 참고 또 참았다. 장장 15시간에 가까운 비행을 했다. 자도 자도 갈길은 멀었고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할 기미가 보이 지를 않았다.
드디어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난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내려서 싸구려 캐리어를 챙겨 공항을 떠났다. 떠나기 전 직원에게 지하철 타는 법을 물었고 내가 갈 숙소를 어찌 가야 하는지 또한 물었다. 그러자 그 직원분은 친절하게 나를 안내해 주었고 나는 교통카드를 끊어 기분 좋게 지하철을 기다렸다. 런던의 지하철은 한국 보다 교통비가 비쌌다. 대처수상 이후 전부 민영으로 돌린 결과라고 알고 있었다. 나는 선진국의 쾌적한 지하철을 기대했으나 내가 탄 열차는 코레일을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객실은 좁았고 의자는 다 해져서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 한참을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옥스퍼드 서커스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나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영국인이냐 물었더니 남자는 아일랜드인이라고 했고 여자는 이탈리아인이라고 했다. 나를 의미 있게 도와준 대가로 신라면컵을 선물로 주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며 가다가 아일랜드 청년이 나에게 물었다.
"아일랜드 하면 무엇이 생각나세요?"
나는 바로 대답했다.
"로비 킨이요! 토트넘의 쌍권총!"
그는 상당히 흡족해하는 미소를 보였다.
그는 또 물었다.
"다른 건 떠올릴만한 건 없어요?"
나는 용기 있게 대답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이요! 위대한 전사들이지요!"
그랬더니 그가 표정이 굳으며 이 공간에서는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언질을 나에게 주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대처수상이 슛투킬이라고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라고 의심만 돼도 무조건 발포하라는 법령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아일랜드 청년은 나의 안위를 위해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인가? 영국땅의 이방인이고 자신의 뜻을 굽힐 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선조들도 의열단을 조직해서 항일무장투쟁을 하지 않았던가?
포커스가 나간 사진이지만 난 무사히 숙소 근처 옥스퍼드 서커스역에 도착했다. 내려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런던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남녀청년들은 담배를 길에서 마구 피워댔고 담배꽁초는 이곳저곳에서 나뒹굴렀다. 고성이 오고 갔다. 잘하면 얻어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4시가 넘었었고 현지 시간으로는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쏜살같이 숙소로 가서 체크 인을 하고 씻지도 않고 잠을 청했다. 혹시나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