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함 속의 '응징할 결심'
<명량>으로부터 8년이 지나는 사이, 한국영화 시장엔 많은 일이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적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그럴수록 자연스럽게 국내 관객들의 시선도 높아지고 날카로워지고 있다. 특히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인한 국내 영화 제작환경의 침체와 극장가의 표값 인상까지 겹친 탓이 크다. 온갖 곡절을 거쳐 완성해낸 영화들도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극장 개봉과 OTT 공개를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는 사이 <명량>의 본위였던 사극 장르는 관객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간 거 같다. 넷플릭스의 대체역사물인 <킹덤> 시리즈가 대성공을 이룬 것을 기점으로, TV에서는 마치 경쟁하듯 퓨전 사극... 아니 대체역사+판타지 시대극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돈 내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되면 시선이 달라진다. 옷 한 벌 입힐 때도 고증오류라는 비판, 역사를 그대로 따라도 진부하다는 비판, 그렇다고 가상 인물의 비중을 높이면 왜곡이라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민족주의적 신파도 이제 웬만큼 잘 포장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시대다. 절망적인 패전을 차갑게 재조명한 <남한산성>이라는 걸출한 시도가 흥행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작비가 다른 영화에 비해 더 많이 들어가는 만큼, 사극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관객에게 선보이게 되는 순간까지 다른 영화보다 더 많은 리스크를 안는다. 말하자면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이다. 관객들은 이제 웬만한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들도,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겠다’는 낮은 기대감으로 발길을 돌리고 본다. 내용은 뻔한데 연출은 더 뻔한 위인 이야기 대신, 허구라 해도 재미있고 작품성도 두루 갖춘 슈퍼히어로물을 소비하는 게 수지가 맞다. 현실은 관객에게도, 영화판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가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럴수록 관객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항상 위인에 대한 갈증이 존재한다. 슈퍼히어로들도 허구라는 명백한 태생적 한계가 있고, 더욱 강한 능력을 발현할수록 현실 세계와 점차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굳이 민족성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역사에 기록된 진짜 이야기의 힘은 그 자체로 허구의 이야기에서 받는 감응을 능가할 때가 있다. 모두 다 아는 이야기가 잘만 만들면 가장 강력하다는 것 또한 사극 장르 특유의 강점이다. 특히 그 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이순신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지닌 의미는 남다르다. 김한민 감독은 <명량>을 만들 때 적어도 그런 관객의 니즈만큼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 이순신의 결사항전을 다룬 <명량>의 대성공과 그에 반비례한 혹평 이후, 감독은 또다시 이순신의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다. 캐스팅의 전면 교체라는 시리즈물로서 전례 없는 시도와, 코로나로 인한 영화 제작의 과도기 속에서 만들어진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 <명량>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한산 해전과 노량 해전까지 이순신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감독 혼자만의 야심으로만 보였던 발언은 8년이 지나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간의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결과물은, 관객의 기대에 부합하는 작품이 됐다.
우선 드라마의 구성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산 해전의 기록은 학익진이라는 상징적인 전술과 수적인 사료는 있을지라도 당시 이순신이 자신의 감정을 간결체로 녹여냈던 난중일기에서의 기록은 없다. 그러니 만약 <명량>의 제작 방식을 <한산>에 적용해 찍었다면, 그만큼 감정적인 창작의 터치가 뛰어들 여지도 많았을 터다.
그런데 극적 중심을 잡는 과정에서 영화는 꽤 의외의 방법을 선택한다. 기록되지 않은 감정보다 있었을 법한 상황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집중했던 포커스도 오히려 대폭 넓힌다. 왜군의 내부 사정도 상세히 조명하고, 조선군 주변 장수들과 지상의 의병들까지 포괄적으로 조감한다. 일개 인물의 감정선보다 전선(戰線) 전반의 움직임을 부각시키는 것은, 전작을 넘어 기존의 모든 국내 전쟁영화와도 결이 다른 작법이다.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왜냐하면 <한산> 속의 이순신이 처한 상황이 <명량>처럼 일방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도 오프닝과 인물간의 대화를 통해 역사 배경을 친절하게 일러주지만, 제작의도와 흐름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 양군의 속사정을 간략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 대첩이었다는 점에서는 정유재란에서 명량 해전이 가지는 위상과 비슷하지만 기실 한산 해전의 내막과 진행 양상은 사뭇 다르다.
한산 해전을 치른 양군의 세력 차이는 조선 수군 55척 대 왜 수군 73척으로, 12척 대 333척인 명량 해전 당시의 처참한 상황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인다. 숫자만 따지면 서로 전면전도 해볼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전쟁과 전투는 소위 ‘어택땅’처럼 머릿수와 힘만 믿고 나서는 싸움이 아니었고, 있다 해도 양측 모두가 처참한 피해만 입을 뿐이다. 그러니 이 전장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선이 어떤지도 살펴야 한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3개월간, 이순신은 전란 이전부터 철저하게 훈련시킨 병력으로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조금의 여유도 자축할 순간도 없었다. 그가 이룩한 연전연승은 한 번 입은 피해를 보수하기보다 철저히 이기는 싸움만 해야 하는 환경 때문이었다. 조정은 한양에서 평양을 지나 의주로까지 피란을 거듭했고 명나라로의 도피까지 계획 중이다. 육군은 용인 전투라는 참패를 맞아 또다시 와해되면서 왜군의 본토 유린을 막지 못하고 있다. 바다에서 아무리 잘 싸워도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면, 전라 좌수영이 있는 여수 지역도 위협을 피할 수 없다.
한편 왜군은 육상의 우세를 그대로 밀고 나가 최종 목표인 명나라로의 쾌속진격을 꿈꿨지만 생각지도 못한 난제에 가로막혔다. 국왕이 파천(播遷)한 한양을 개전 20일 만에 손에 넣었을 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남해에서 웬 장수 하나가 나타나더니 옛날부터 자신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던 바다를 종횡무진하고, 만나는 족족 속절없이 깨진다. 이제는 개전 때 손쉽게 뚫고 성까지 쌓아올린 부산까지 위협받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남해를 평정하고 강가가 많은 서해 쪽으로 진출해서 지상군을 먹여 살릴 해상 보급선을 완성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바다에서 활개를 치도록 놔둔다면 명 진출은 고사하고 조선 땅에서 고립무원이 될 판국이다.
이렇듯 한산 해전은 조선과 일본의 명운을 바꿀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순신은 한 번 지면 언제 재기할지 모르는 수군, 나아가 조선의 명운을 지키는 완벽한 승리를 위해, 왜군은 이순신을 향한 설욕과 동시에 남해-서해를 잇는 보급로 확보와 명 진출이라는 대전략을 완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명량 해전이 누가 봐도 승패가 뻔해 보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면, 한산 해전의 스케일은 고대 서양사의 불세출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과 로마군이 일장일단의 형세에서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치른 포에니 전쟁의 분수령, ‘칸나이 전투’에 비교할 수 있겠다(물론 침략하는 쪽은 반대지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캐릭터인데, 우리의 주인공 이순신이 생각보다 너무 과묵하다. 언성에 높낮이도 거의 없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다. 왜란에서 승리를 거듭했으나 녹둔도 만호 시절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꿈으로 남아 그를 괴롭히는 데서 인간적인 약점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진중할지언정 <명량>의 최민식 배우처럼 죽음을 등 뒤에 두고 싸우러 가는 듯한 처절함은 적다. 아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가끔은 아군에게도 이순신의 침묵을 미스터리라 여기는 지점도 존재하며, 거대한 전투를 앞둔 인물의 정숙함은 <명량>의 비장미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일차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지점이다.
박해일의 이순신은 '나라를 홀로 구한 성웅'이라는 대중적 영웅상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 그는 주어진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해서 이겨야 하는 자리에 있는 전략가다. 성격을 비유하자면 웬만해서는 수면에 파문이 일지 않는 호수다. 그 수면 밑에 있는 것은 인간성이라기보다는 전장이라는 세상을 관조하는 선비, 혹은 신선에 가까운 전지성이다. 의외로 이는 이순신의 절친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언급했던, '말과 웃음이 적고 단정한 용모로 늘 몸과 마음을 닦았다'는 이순신의 행동 양식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성으로 비중이 높은 것은 오히려 변요한 배우가 맡은 왜군의 주장(主將) 와키자카 야스하루다. 그는 이순신과 반대로 타오르는 불과 같은 혈기와 재기를 갖춘 사내다. 패잔병들을 처형하는 냉혹함과 이순신을 넘어 명을 넘보는 야망, 견원지간인 가토 요시아키의 함선들을 수중에 넣는 전략적 수완, 번개 같은 과단성으로 이룩한 용인 전투의 대승을 바다에서도 거두겠다는 기세로 가득한 웅재. 영화에서 다각도로 표현되는 와키자카의 성품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당시 중세의 일본 남성에게 요구되었던 사무라이로서의 이상적인 자세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부각되지 않는 이 인물을 이순신의 라이벌로 격상한 적이 예전에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와키자카를 반동인물(Antagonist)을 넘어 영화의 주동인물(Protagonist)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강수를 둔다. 전작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음흉한 메인 빌런에 그쳤다면, 와키자카는 이순신의 관찰자이자 흐름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페이크 주인공의 위치에 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외국인이 보면 그의 패배를 안타깝게 느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게 물과 불, 선비와 사무라이, 당대 조선과 일본의 모범을 대표하는 두 인물의 대국적 전략과 거북선을 두고 벌이는 양 세력의 수싸움을 다층적으로 펼쳐낸다. 극적 긴장감을 위한 가공의 전초전에도 충분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당시 수많은 병사들을 휘하에 두고 지휘했던 만큼 이순신이 상대한 적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졸장이 아니었다고 느껴지게 된다. 일본을 향한 적대적 정서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상대측을 어떻게 자신들의 전략에 빠뜨릴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극의 중심으로 삼는다.
조금 더 나아가 전쟁 자체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비치는 캐릭터는 김성규 배우가 분한 왜장 준사다. 다이묘에 충성을 바쳤는데 버림받아 포로가 된 신세를 개탄하던 그는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는 이순신의 답변에 조선의 편에 들어가 이중 스파이가 되기로 한다.
그래도 준사의 내적 고민은 얄팍한 수준에서 그칠 뿐, 전장을 더 넓게 조감하는 도구로만 활용되는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사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모두의 개성과 역할은 한산의 대결을 위한 빌드업에 그치는 느낌이다. 세작을 통한 첩보전과 견제, 왜군 내부의 모략과 외교를 통해 벌어지는 왜 육군과 의병대의 지상전까지, 많은 것을 보여주는 동안 인물간의 스포트라이트는 조금씩 들쭉날쭉하다. 원균과 가토, 임준영과 정보름 등의 주변 인물들은 평면적인 걸 넘어 어느 순간에는 존재감이 사라진다. 심지어는 주인공인 이순신조차도 건조함을 넘어서 너무 아득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다수가 움직이며 만들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재연하는 태도를 뚝심 있게 유지한다. 수많은 히어로가 등장했던 MCU의 <인피니티 워>가 거침없이 전개되었던 것도 이전까지의 모든 내용을 관객이 숙지했다는 전제 덕분이었듯, <한산>에서는 그 배경지식을 최소한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역사 그 자체에 두는 선택을 한 것이다. 느릿하지만 꾸준하게 움직이는 해류처럼 차분한 전개에 힘입어, 짜임새 있게 맞춰진 양군의 형세는 어느덧 결전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인 견내량 해협에서의 전투가 시작될 때, 이러한 아웃포커싱의 장점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이순신의 일대기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산 해전이 '압도적인 승리'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그 말 그대로 적용하면 너무 싱거운 전개가 된다. 하지만 전투는 예상외로 시작부터 마무리 직전까지 치열하기 그지없게 전개된다. 영화가 주동인물인 와키자카의 시점을 그대로 해전까지 끌고 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순신을 잡아먹으려 분전하는 와키자카의 모습은 작품의 입체성과 몰입도를 상승시킨다.
해전의 시각적 묘사는 차근차근 쌓아올린 전반부를 쫓아온 관객의 기대를 유감없이 만족시켜 준다. 병사와 함선뿐 아니라 지형지물과 날씨, 해류까지 염두에 둔 ‘입질’로 서로를 자신이 원하는 전술 안으로 끌어내려 일합을 주고받는 과정은 전쟁물과 사극 마니아들의 오랜 갈증을 풀어줄 만큼 밀도가 높다. 여기서 선체에 얇은 철판을 두르고 화포를 운용하는 거대한 왜군선도 고증오류가 아닌, 실제로 안택선을 개량해 만든 일본식 철갑선 '텟코센(鉄甲船)'을 염두에 둔 배다(크고 아름다운 충각과 함포 사용의 고증오류는 눈요기 정도로 봐주자).
비단 학익진 외에도 와키자카의 어린진(魚鱗陳)과 이순신의 첨자찰진(尖字札陣) 등, 국내 사극전쟁물에서 보여준 적 없는 고급 진법들의 등장은 이 영화에 더욱 특별한 역사적 개연성을 깃들게 한다. 전투에 앞서 학익진 첩보를 들은 와키자카가 일본 최고의 명장 다케다 신겐의 일화까지 언급하며 오히려 득의만만해하는 부분에서는, 강연 준비가 완벽한 연사의 재치가 느껴질 정도다. 어린진을 짠 신겐의 돌격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학익진을 완전히 분쇄해 버렸던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실제 기록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전작의 두 배에 가까운 제작비를 들인 만큼 해전 본편의 엄청난 스케일을 표현하는 CG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비록 CG가 지양해야 할 ‘CG스러움’이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점은 아쉽다. 그러나 양측의 치열한 전술 대결과 전선들의 웅장미가 이런 단점을 잊고 몰입하게 만든다. 해전의 모든 장면을 세트장에서 촬영했음에도 이 정도의 현장감을 자아내기는 어려운 일인 만큼, 비판보다는 칭찬을 더해 주고 싶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사운드다. 전선들의 움직임이 빠르지만 해수면을 때리며 나아가는 뱃소리와 천둥 같은 포성 때문에 전투의 전개는 가볍게 느껴지지 않고 역동적이다. <명량>에서 한국영화 사상 전례가 없는 장엄함을 선사했던 김태성 음악감독의 OST는 비록 전작과 거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인상적인 순간에 적절하게 리프라이즈되며 더욱 큰 벅차오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시청각적 물량공세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역시 ‘용의 출현’, 즉 거북선의 등장이다. 영화는 거북선의 활약에 대해 비어져 있던 역사의 틈새에 비로소 꽁꽁 아껴두고 있던 각색을 채워 넣는다. 그 결과 <한산>의 거북선은 그동안 대하사극을 비롯해 모든 영상매체에서 보여준 활약상이 무색할 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가 거북선이라는 무생물에 일종의 생동성을 불어넣으려 한다는 것이다. 작중에서 와키자카가 용머리 이빨 장식을 습관처럼 만지는 장면은, 흡사 살아 있는 괴수를 대하는 듯한 공포가 스며 있다. 거북선은 이에 응하듯 격군과 화포수를 동력삼아 생명력을 폭발시키는 용으로 현현한다. 용은 옛날부터 군주의 상징인 동시에 바다의 지배자로서, 물 위를 휘저으며 불을 뿜어대는 양가적인 이미지의 결합체였다. 물의 이순신과 불의 와키자카가 실력을 겨루는 전장, 한산 해전의 압축판이기도 한 것이다.
거북선의 대활약으로 흐름이 바뀌고 나서 종반부에 다다를 무렵, 영화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와키자카의 왜군에서 이순신으로 완벽하게 시점을 전환한다. 완성된 학익진이 왜군을 일거에 궤멸시키는 것으로 전투는 싱거울 만큼 빠르게 종료된다. 부하 장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며 멀찍이서 전장을 지휘하다가, 적이 걸려든 순간 발도술과 같은 일격으로 거꾸러뜨린다. 이 또한 <명량>에서 백척간두의 수세에도 홀로 나아가 적을 거꾸러뜨리던, 계책보다 결사의 의지가 더 강했던 이순신과 차별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잠깐, 앞서 형세를 비유하기 위해 언급했던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를 다시 끌어와 보자. 두 전투는 전개상으로도 유인 후 포위섬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한니발의 경우는 미리 병과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두었다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진형을 바꾸어 에워싼다면, 이순신의 경우는 기습적인 반포위라는 데서 더 어렵다. 본편의 훈련 과정에서도 묘사되듯이, 바다에서는 각 함선의 거리두기를 위한 격군 통제, 거기에 파도와 해류까지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포진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군다나 16세기의 해전이다.
그런데 한산 해전과 칸나이 전투 사이에는 또 하나의 거시적인 차이점이 있다. 바로 전투 이후에 벌어진 전황이다. 한니발은 칸나이 평원에서 일생 최대의 승리를 거뒀지만, 로마가 강화 협상을 제시하리라 예상하고 로마 대신 근처 도시들만 수중에 넣어 가며 시간을 끌었다. 결과적으로 한니발의 판단은 로마 공략의 적기를 놓쳤고, 다시 단결한 로마는 한니발이 현지 보급을 하기 어렵도록 청야전술과 지구전 등 온갖 방해 전술로 한니발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결국 한니발의 군대는 두 번째 대회전인 자마 전투에서 참패했다.
반면 이순신은 완승의 기쁨을 만끽해야 할 순간에도 여전히 담담하다. 수군이 계속 출동을 이어나가 부산포 해안의 왜군 함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극은 느릿하게 마무리된다. 임팩트 있는 엔딩을 바랐던 관객들에게 <한산>의 결말은 지지부진하다고 여겨질 만하다. 하지만 극적인 엔딩 없이 사실을 진득하게 펼치며 끝내는 것이 전장을 넓게 비춘 영화의 시선에 더 어울린다. 전술을 넘어 대전략에서의 승리까지 염두에 둔 이순신의 천재성과 집념은 더욱 설득력 있게 역설된다. 이 점을 알고 이순신을 다시 보면, 그 눈빛 안에서 시퍼런 '응징할 결심'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한편 학익진의 모티브가 되는 학은 조선의 선비들이 학문을 갈고 닦는 동안의 외로움을 고결함으로 승화해내고자 글감으로 즐겨 쓰던 동물이다. 이는 작중 이순신의 고고하면서도 자못 외로워 보이는 이미지와도 부합한다. 얇고도 길게 뻗은 포위진을 말 그대로 불가침의 성벽과 같은 연출로 보여주려 한 데서는, 연출자가 비단 인물 자체뿐 아니라 상황에도 캐릭터성을 녹여내려 고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치밀한 성품은 배우의 연기를 넘어 전장을 조망하는 카메라에 깃들고, 영화 전체의 화술로 구현된 것이다.
<명량>을 둘러싼 상황은 영화 안쪽으로도 바깥쪽으로도 중간이 없었다. 상업영화의 기본인 재미와 정서적 쾌감을 가져다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1700만이라는 괴물 같은 흥행 스코어는 사실상 완성도와 별개의 요인 덕이라 생각한다. 배급사의 일방적인 극장 점령과 이순신의 이름에 동하는 국민정신, ‘다들 보니까 나도 본다’는 집단심리가 맞물려 생긴 기록이다. 반대로 평단에게서는 일차원적 문법과 민족주의의 지나친 설파, 거기에 고증오류까지 골고루 언급되며 비난의 십자포화를 받아야 했다.
<한산>은 와신상담의 결과다. 포스터 색상처럼 냉정하면서도 시원하다. 전작의 약점을 스스로 보완하면서 '전략의 재미'라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낸다. 고증을 높이면서도 창작도 적정선을 타고, 시선을 넓히면서 구성을 탄탄히 챙기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그 결과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이순신도 와키자카도 거북선도 아닌, 이들 모두가 싸우는 전장, ‘한산 해전’ 그 자체가 되었다.
영화의 전반적인 만듦새는 전작 이상이라 단언할 수 있지만, 감정이 줄어든 만큼 호불호가 갈릴 지점도 분명 존재한다. 치밀한 전개와 해전의 극적 쾌감을 두루 갖췄다고 말할 수도 있고, <명량>에 비해 몰입이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편집된 부분도 없지 않아 보이며, 웅치 전투라는 의병들의 분전은 시기상 일치할지언정 영화 전개상으로는 조금 작위적이다. 전투 종료 직후 한산 앞바다에서의 에필로그도 왠지 모르게 전작을 의식한 사족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일본어 발음은 후속작에서 꼭 고쳐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를 면밀히 점검하고 역사를 재조명한 제작진의 의식과 자기개선의 태도를 높이 사고 싶다. 상업영화로서 국내 흥행 1위라는 대승리를 일구고도, 자만하지 않고 새로운 문법에 도전했다. 전장에서 상승(常勝)하고자 끊임없이 작전을 연구하고 실행한 이순신의 자세와 비슷하다. 치밀함이라는 어렵지만 탄탄한 길을 택한 결과, <한산: 용의 출현>은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력이 아깝지 않은 대작이자 품격 있는 전쟁 영화로 탄생했다. 후속작 <노량: 죽음의 바다>는 아마 <명량>에 가까운 감정적 서사로 회귀하리라 예상되지만, 이 작품에서 얻은 장점도 쭉 가져가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