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 우상, 시네마,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
지난 6월부터 조금씩 영화 분석 리뷰를 쓰기 시작한 이래 몇 가지 고민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읽힐까? 어떻게 하면 해석을 더 설득력 있게 내놓을 수 있을까? 또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읽힐 수 있을까도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글이란 결국 읽혀야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순수하게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던 영화 감상이 언제부터인가 온갖 해석을 들이대게 되면서 점차 재미와 동시에 피로가 생기는, 양가적인 행동이 되어버린 거 같다. 쉬운 영화는 그저 못 만든 영화 같고, 어려운 영화는 마치 숙제 같아지는 부끄러운 마음이랄까. 물론 해석이 또 하나의 재창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리뷰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부담감과 성취를 동시에 수반하는 행위다. 하물며 나와 독자들처럼 때로는 무덤덤하기도 하고 때로는 까탈스럽기도 한 불특정 다수의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여야 하는 감독의 마음은 어떨까.
조던 필 감독은 아마 ‘나 영화 좀 본다’고 자부하는 리뷰어들에게 환영받는 감독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입봉작인 <겟 아웃>과 차기작 <어스>에서 점층적인 이미지 속의 도전적인 주제의식을 숨겨놓고, 관객들에게 온갖 흥미진진한 해석을 유발하며 화제에 올랐다. 한편으로 이런 미장센이 자기과잉이며 과대평가받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번 신작 <놉>은 특히나 그런 비평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가장 무난하게 읽히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작품이니까. 그래서 처음 보고 나선 흥행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 작품이, 되짚어볼수록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더더욱 특별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하 리뷰 전반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I will cast abominable filth upon you, make you vile,
and make you a spectacle.)
시작부터 섬찟한 나훔서 3장 6절을 인용한 후, 영화는 자신이 그 구경거리를 만드는 공간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확실히 한다. 시트콤이 만들어지는 TV 스튜디오와 고전 서부극들의 촬영장이었을 대평원과 목장, 현대 광고 촬영장의 그린 스크린을 차례로 비추며 영상 산업의 역사를 압축해 낸다.
영화의 주인공인 OJ 헤이우드(대니얼 칼루야 扮)는 촬영장에 말을 협찬하는 말 사육사다. 그는 영상보다 항상 자신의 말이 우선이다. 자신에게 말 사육을 가르친 아버지가 의문의 기현상으로 죽으면서 자신이 협찬 사업을 이어받게 됐지만, 촬영장은 그저 말에게나 자신에게나 어색한 공간일 뿐이다. 쇼맨십이 강한 여동생 에메랄드 '엠' 헤이우드(키키 팔머 扮)는 반대로 영화나 미디어 사업에 적극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말들이 사라지는 기현상이 다시 생기기 시작하고 자신의 목장 주변에 웬 거대한 비행접시가 주기적으로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OJ와 엠은 이 외계인을 향해 철저히 영화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 녀석을 잡아내서 해부하거나 그 근원을 따지지 말고, 그냥 카메라로 녀석을 찍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조던 필 감독 본인이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구경거리에 대한 창작자로서의 생각을 담은 영화다. <놉>은 영화의 시작점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강한 이미지들을 통해 영화의 본질인 눈과 관련된 행위를 파고들고 있다. 상술했듯 감독 역시 <겟 아웃>으로 장편영화를 찍기 시작한 이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자신의 작품으로 하여금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수많은 평가와 해석을 받아왔을 것이다.
시각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관객의 본다(watch)는 행위와 창작자의 보여준다(show)는 행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특히 창작자의 경우는 그 느낌이 한층 양가적일 것이다. 영화 촬영은 사람과 사물을 보고 자신의 뜻으로 해석하여, 담아낼 때는 피사체를 온건히 남아내고자 하는 열정과 오독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이 담긴 행위다. 동시에 그 행위를 극장을 통해 다수에게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창작자에게 영화는 엄청난 스트레스이자 동시에 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문 촬영 감독인 앤틀러스 홀스트(마이클 윈콧 扮)는 영화인으로 성공하고자 자신에게 연락하는 엠에게 ‘네 꿈은 실현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의 모습은 자부심이 느껴진다기보다 왠지 지쳐 보인다. 아마 그 원인 역시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본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시시각각 평가받아 왔으며 그 결과가 좋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가 편집 중인 자연 다큐멘터리 속의 장면들은 항상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거나 죽이고 있는 장면들이다. 사냥과 식사는 다큐멘터리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끌게 만드는 하이라이트다. 시선집중과 자극에 대한 은연중의 욕망은 결국 앤틀러스를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어 버린다.
영화의 성패에 있어 ‘소재에 대한 이해’는 그만큼 중요하다. 잘못된 이해가 가져다주는 역효과란 어마어마할 것이다. 다큐멘터리 외에도 작품 속에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말과 침팬지다. 이들은 개, 고양이에 버금갈 만큼 미디어 매체에서 많이 노출된 동물들이기도 하다. 말은 영화의 시작이자 서부극의 상징이고, 침팬지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닮아 보인다는 것만으로 각종 다큐멘터리나 코미디의 소재가 되었다. 그런데 카메라와 수많은 사람들 앞에 비친 두 존재는 결국 거울과 풍선에 비친 자기 자신까지 자신을 보게 되자 폭력성을 내보인다.
시선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앞에 나서지 않으려 하는데, 그런 의지 표현을 못하는 동물을 무작정 내세우면 결국 본능적으로 거부 행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이미지 착취에 대한 이야기는 전개상으로만 볼 때 매우 튀어 보이지만, 넓게 보면 비행체의 정체와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맞이할 결말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외계 비행체는 겉보기에는 UFO 그 자체 같지만, 점차 우리가 UFO라 정형화했던 사물을 벗어난다. 모습이 드러날수록 마치 자아를 갖춘 풍선 같아 보이는 녀석은 다큐멘터리 속의 동물들처럼 무언가를 먹어치우는 생명체의 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후반부에 가면 비행접시의 외양에서 벗어나 어떻게 보면 해파리 같기도, 어떻게 보면 꽃 같기도 한 비주얼을 보여준다.
한데 오프닝 크레딧에서 비행체의 몸체 내부의 사각형 속에서 말의 활동사진을 비추고,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즉 생명체의 눈이자 입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부분이 아코디언과 비슷한 폴딩 카메라의 단면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비행체는 영화의 눈이 되는 카메라를 상징함과 동시에 카메라의 안티테제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사람의 시선을 연장하여 사물의 순간을 잡아내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만드는 도구라면, 비행체는 반대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잡히기를 꺼려하며 눈으로 사람을 잡아먹어 영원히 없애버리는 동물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말과 함께해 오며,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에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동물의 습성을 잘 알게 된 OJ는 비행체의 동물적인 특징을 짚어낸다. 마지막에 OJ가 살아남는 것도, 그 동물의 눈을 피하지 않고 (주프와 고디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 대 일로 마주보면서 일종의 교감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행체가 보았던 활동사진 속 흑인 기수와 OJ의 말 탄 모습이 닮아서 ‘저것은 내가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다.
흑인 기수의 활동사진을 보고 목장에 자리를 틀었다는 점에서 비행체는 인간이라는 콘텐츠의 소비자이기도 하다. 눈에 해당하는 부위로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지만 사물은 뱉어낸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소화하고 더 많은, 더 큰 자극을 찾으려 돌아다닌다. 한편으로 작품의 후반 앤틀러스가 비행체를 향해 읊조리는 노랫말을 짚어볼 필요도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빌헬름의 비명으로 유명한 쉡 울리의 ‘The Purple People Eater’의 가사다(감독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컬러 퍼플>을 노린 곡 선정일 수도?). 어디선가 우스꽝스럽게 생긴 괴물이 나타나 가수가 되어 유명해진다는 내용으로, 대중의 소비재가 된 자신에 대한 풍자가 은연중에 깔려 있는 노래이다. 즉 이 녀석은 인간 소비자인 동시에 결국 외계인 콘텐츠라는 소비재이기도 한 것이다. 단 창작자는 되지 못한다.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 그저 먹고 뱉을 뿐이니까.
비행체가 무엇이든 먹어치운다는 습성을 알아챈 엠은 주프가 연기한 소년 보안관의 거대 풍선을 띄워 올려 비행체를 유인하고, 풍선이 터지는 순간 비행체 역시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비행체가 맞은 결말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미디어로 인해 팽창된 주프의 자아는 공허하고, 콘텐츠를 잡아먹는 비행체의 내면 또한 공허하다. 그리고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둘은 외형을 잃고 공멸하는 것이다. 여담으로 엠이 우물 속 카메라로 잡아내는 비행체의 최후의 순간은, 비행체 자신이 눈을 통해 사람들을 잡아먹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 모양의 프레임에 담겨 있다. 비행체의 행동 패턴을 보기 위해 설치한 튜브맨의 보편적인 사용 목적이 원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이미지의 함의를 비트는 것 또한 조던 필의 장기다.
또 하나의 사족일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들이 비행체에게 붙인 ‘진 재킷(Jean Jacket)’이란 이름도 흥미롭다. 움직임이 마치 옷감처럼 펄럭인다는 데서 그간의 정형화된 비주얼을 깨뜨리고 있다. 한편 진 재킷, 즉 청재킷의 원류가 되는 것은 당연히 데님 청바지다. 원래는 그 질긴 재질 때문에 카우보이나 광부들의 작업복으로만 쓰였다. 하지만 60년대 들어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을 비롯한 할리우드의 청춘스타들이 청바지를 즐겨 입으면서 데님이라는 옷감이 하나의 패션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보인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달라진 케이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보인다는 것은 자연스레 등장인물이 꿈꾸는 우상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오프닝에서 상술했던 나훔서는 성경 중에서도 유독 비중이 낮은 권이다. 그러나 우상숭배 종교를 갖고 있던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향해 멸망이 있으리라는 예언을 위 구절과 같이 매우 무시무시한 어조로 담아내고 있다. 비행체가 자신의 본모습과 눈을 드러낼 때, 도입부에서 왜 그리 살벌한 멸망 구절을 썼는지 알 수 있다. 흰색 비주얼부터 날개까지 마치 우상들을 벌하기 위해 나타난 천사 같기 때문이다. 천사는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 형태에 날개를 단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성경 구절을 뜯어보면, 악몽에나 나올 법한 코스믹 호러의 비주얼을 가지고 있는 천사도 있다. 특히 인류의 심판을 다룬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제2품의 지천사 케루빔(Cherubim)이 눈과 날개만으로 이루어진 이 비행체의 외양과 굉장히 흡사하다.
한편 영화는 보는 자와 보여주는 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하관계가 연상되는 도식을 세우고 있다. 모든 캐릭터 포스터는 하늘 위의 존재를 높이 올려다보는 행위를 부각한다. 이는 경외심, 즉 우상을 대할 때의 행위이다. 동시에 주인공들은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종사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며 주목을 받는 우상이 됨으로써 성공하려 한다. 그 소재가 되는 비행체는 자신을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데서 <놉>은 우상숭배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 바로 헤이우드 남매의 상대역인 리키 '주프' 박(스티븐 연 扮)이다.
아역배우 스타 출신의 주프는 자신의 유명세를 연장시켜 놀이공원을 세우고 마치 신에게 공양하듯 UFO에게 말을 희생시킨다. 결국 주프 자신을 포함해 모든 손님들이 통째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주프는 희열에 가까운 표정을 보인다. 그의 이런 태도가 가능한 것은 과거 TV쇼에서 광란을 저지른 침팬지에게서 홀로 살아남게 된 순간 자기 자신에게 어긋난 신성성을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란의 현장 가운데서 이질적일 정도로 꼿꼿이 서 있는 컨버스화는 마치 하나의 계시인 것처럼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 캐릭터의 미들네임인 주프, 즉 주피터(Jupiter) 또한 허투루 작명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우상숭배라 지칭했던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의 영문명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틀러스도 이러한 우상으로서의 자신을 이룩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작품을 찍으려다 거기에 과몰입한 나머지 자멸해 버린다.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치곤 특이한 앤틀러스(Antlers)는 사슴뿔을 의미한다. 서구권에서 공격적인 의미로 자주 쓰인다는 점에서 앤틀러스가 찍었던 다큐멘터리의 장면과 결부하여 그의 내밀한 공격성을 암시하는 장치가 된다. 또한 사슴뿔 역시 고대부터 우상숭배의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OJ와 엠은 주프와 앤틀러스에 비하면 신참이고, 돈과 유명세를 얻고자 하는 점은 이들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이 좋아했던 일, 즉 제대로 된 영상이나 사진 ‘오프라 샷’을 남기는 것 자체에 더 열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가족애와 인간애를 통해 이 열정을 조절할 줄 안다. OJ가 동생을 위한 자기희생의 태도를 보임으로서 엠은 비로소 자신이 갖고 싶어 했던 역할을 오롯이 수행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오프라 샷을 따낸다. 엠이 진 재킷을 잡아내는 카메라가 있는 도르래 우물이 영어로 Wishing well, 즉 동전을 우물 속에 던지면 소원을 들어주는 우물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그런데 조던 필이 우상에 대해 무작정 비판적인 논조를 가진 것은 아니다. <놉>은 구성이나 소재, 연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뿌리인 미국 영화의 우상들에 대한 경의가 듬뿍 담긴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할리우드의 후예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네 명의 대감독에 대한 경의가 가득 담겨 있다.
카우보이와 목장, 광대한 대지 위로 홀로 달리는 기수를 쫓아가며 자연과 인간의 대비라는 '스펙터클'을 자아내는 장면에서는 서부극의 상징이자 할리우드의 근본정신을 이룩한 거장 존 포드의 연출이 떠오른다. 조명의 온/오프를 통해 저택의 그림자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싸이코>)을 비롯해 주인공과 거대한 크기를 부각하는 비행체의 추격 장면(<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과 외계인을 ‘몰래 숨어서’ 찍는다(<이창>)는 점에서는, 공포의 빌드업과 발화점을 정립한 서스펜스의 달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향력이 느껴진다(끝까지 외계인의 정체를 안 알려준다는 맥거핀까지!).
또 작중에서 주인공들이 숨은 저택 위로 피의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명백하게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의 오마주다. 침팬지와 외계에서 온 물체가 한 영화 안에 등장한다는 데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다. 그리고 외계인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결과적으로 가족 간의 휴머니즘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당장 조던 필이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작품이 외계인을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담아내야 할 대상으로 접근했던 <미지와의 조우>다. 전반부까지 포식자나 다름없는 비행체가 존재를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구름 속에서 알음알음 보인다는 방식에서는 공중 버전 <죠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이 없으면 경의는 생길 수 없다. 영화 속에 꽉 찬 오마주는 조던 필의 창작자의 고뇌뿐만 아니라 영화의 소비자, 즉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영화에 대해 가진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주제와 더불어 생각해 보면, 프로듀서(제작자)와 컨슈머(소비자)의 결합인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새로 생겨날 정도로 미디어의 창작과 소비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현 시대에 대한 메타적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겟 아웃>과 <어스>에서 조던 필은 각각 인종차별주의와 연대의 모순을 통해 미국의 본질에 대해 질문해 왔다. 제작자로 참여한 <환상특급>과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에서는 오밀조밀한 연출이 다소 희석되어 인종주의 교훈극에 천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놉>에서는 다시금 매우 세련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던 필의 정치적 질문은 덜해졌을지언정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두 작품에 비해 동양인과 라틴계 등 다양한 인종이 등장한다는 데서 더욱 포괄적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흑백이어야 할 엔딩 크레딧을 굳이 점점 다색으로 변하도록 처리한 것도 의미가 있다. 흑백에서 컬러로 진화하며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한 영상매체의 상징화면서, 그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사업에 종사한 다양한 인종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재조명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모두는 영화에 대한 꿈으로 영상업계에 입문한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영화산업에서 멀어져 있다. 흑인인 헤이우드 가족의 경우 자신의 조상이 영화의 시작에 끼친 업적을 직접 피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입지가 이미 좁디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세울 수 있는 참여 작품이라 봐야 20년 전 영화인 <스콜피온 킹>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OJ의 이름을 ‘그 OJ?’라고 되묻는 데서는 코미디언 특유의 사르카즘이 느껴진다. 흑인의 역사에서 인권 상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가 그 위상을 순식간에 추락시킬 뻔했던 OJ 심슨 사건에서 따온 게 틀림없으니까. OJ 심슨의 재판이 처음에 불리하게 된 데에는 흑인을 향한 매스컴의 스테레오타입적인 접근도 한몫했다. 즉 이름부터가 매스컴을 향한 우회적인 돌려까기다.
한편 엠의 원래 이름인 ‘에메랄드’는 행운과 조화를 상징한다. 그녀는 외계인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잡고자 하는 데 누구보다 강한 열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에서 엠이 필생의 오프라 샷을 건진다 해도 그들의 미래가 밝을 거라 마냥 장담할 수도 없다. 그들의 꿈처럼 매스컴을 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막으려는 미국 정부에 의해 꽁꽁 숨겨지고 ‘사실은 이것도 합성이다’라는 루머로 끝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심하게는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이 둘에게 전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양인인 주프는 어떤가. 카우보이라는 미국의 상징을 몸에 두르고 목장 테마의 놀이공원을 경영하며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성공한 삶을 영유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어릴 적부터 쌓아 올린 유명세는 결국 할리우드의 인종차별 비난을 피하기 위한 ‘토큰’ 정책에 맞춰져 이용당한 결과이다. 그가 출연한 TV 가족 시트콤 <고디가 왔다>의 포스터를 보자. 주프가 소파에 앉아 침팬지 고디와 주먹을 맞부딪히는 모습은, 뒤에 서서 이들과 피부를 맞대고 있지 않은 백인 가족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감과 불온함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사업장에서는 오히려 자식들을 통해 외계인의 스테레오타입을 장사에 이용하고 있다.
백인 남성인 앤틀러스가 그나마 아직까지 명성을 갖춘 케이스지만, 그 역시 꿈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유명한 감독이라면 말해주지 않아도 될 업적을 굳이 누군가가 띄워준다는 것도 그렇고, 누군가의 개인 작업도 봐준다는 게 성공한 감독의 스케줄이라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 있다. 즉 그는 한마디로 퇴물에 가까운 인물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조력자인 엔젤(브랜든 페레아 扮)의 존재는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지워진다. 라틴계 인종인 그 역시 모델인 애인이 방송을 타면서 자신을 차 버렸고 전자상가 점원으로 일한다는 것에 자괴감을 겪고 있다. 초반부에 헤이우드 남매를 도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조수로서 앤틀러스가 결정적인 샷을 찍는 걸 도와주는 등 주인공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상을 찍는 데 적잖은 활약을 보였음에도, 마지막에 가서는 철조망과 고무풍선에 얼굴이 가려지는 등 그 존재감이 희박해진다. 이것은 캐릭터의 주목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연출일 수도 있다. 마치 영화산업의 시발점에 일조했으나 정작 존재가 잊혔다는 헤이우드 가문의 조상처럼 말이다.
비행체는 그런 이들을 핍박하는 존재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새로운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할리우드의 주변인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UFO라는 특종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아메리칸 드림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지는 못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메리칸 드림이 모두에게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영화는 여전히 ‘Nope’이란 제목으로 대답하고 있다.
<놉>은 조던 필의 미니멀하면서도 디테일한 연출 스타일이 블록버스터화된 영화다. 예상에 부합되어 가다가도 어느 순간 그 예상의 근처에도 못 가거나, 어떨 때는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이 외계인의 존재를 쫓아가는 과정이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자못 느릿하고, 외계인 콘텐츠에 익숙한 관객에겐 감질나는 감이 있다. 일반 관객들이 잔잔하게 펼쳐지는 이미지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작품의 흥행이 갈릴 터다. 결국 영화의 상업적 성공이란 보여주는 이가 아닌 보는 이에 달렸으니까.
하지만 이미지의 함의를 파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놉>은 ‘Dope(대략 ‘쩐다’는 의미의 슬랭)’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조던 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산업에 대한 경각심과 애정을 모두 담고 있다는 데서 뛰어난 통찰력과 오마주로 가득하고, 미디어 산업의 종사자로서 개인의 경험적 산물을 창의성 가득한 이미지들로 펼쳐낸다. 주제 측면에서는 창작자뿐 아니라 이를 소비하는 관객의 현재도 짚는다는 점에서 감상과 비평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볼거리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영화에서도 아이맥스 카메라를 대놓고 보여주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은 역시나 극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혹여나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스포일러 리뷰를 클릭하신 여러분께서 드리는 말씀. 이 영화는 되도록 아이맥스로 보시기 바란다. 영화를 보고 어리둥절하게 나오신 분들께는, 이 졸문이 약간의 도움이 되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