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심은 어쩔 수 없다
이전에 <왕좌의 게임>의 결말에 대해 따로 작성했던 글이 있다. 할 말이 많았지만 간추리자면 '용두사미 중의 용두사미'였다. 분명히 시즌 6까지는 피 튀기는 중세 판타지 시대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등장인물들이, 시즌 7, 8을 통해 우연도 필연도 아닌 극작가의 캐릭터 파괴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매주 한 화를 꼬박꼬박 챙겨 보던 팬들의 마음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린 결말 이후, 나는 한동안 이 시리즈를 건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대한 팬심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한 모양이다. 특히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온갖 시적인 비유와 중의적인 돌려까기, 이야기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다시 감상할 때는 무릎을 치며 탄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즌 7, 8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의 완성도는 지금 봐도 여전히 역대 드라마 중 최상급의 품질을 자랑하는 '작품'이었다. 단지 그 감정이 뒤로 갈수록 시청자로서 뼈아픈 결말로 이어진다는 데 대한 심드렁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도리가 없다(마치 <만달로리안>의 완성도에 흡족해하다가도 스타워즈를 말아먹은 시퀄 시리즈로 이어진다는 걸 깨닫을 때의 그 느낌.)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말할 땐 농담 삼아 '결말이 없는 드라마'라고 하기도 했다.
<왕좌의 게임>으로부터 200여 년 전의 역사를 다루는 프리퀄 <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소식이 들리자마자 다시금 기대감이 폭발적으로 올라감과 동시에, 어차피 그 엔딩으로 가는데 볼 의미가 있나 하는 이중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 작품은 프리퀄이니 이미 정립되어 있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원작자인 조지 R. R. 마틴이 <불과 피>라는 책까지 내가면서 정립한 타르가르옌 왕조의 사상 최대 왕위계승전쟁인 '용들의 춤'을 다루고 있다. 망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를 두고 실망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리고 지금 막 프리미어 감상을 마친 느낌은, 어쩔 수 없이 이 시리즈에 가지고 있던 노스탤지어가 일정 부분 해소되는 느낌이랄까. 내가 <왕좌의 게임>에 기대했던 모든 것이 들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색다르다.
<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전반적인 시각적 스케일은 1화부터 <왕좌의 게임>을 뛰어넘는다. 원전인 '용들의 춤'의 시작 시점이 웨스테로스의 전성기인 만큼 의상과 갑옷, 배경이 화려할 수밖에 없다. 전작이 작품의 분위기 탓인지 갈수록 의상들이 칙칙해졌던 것에 비하면 르네상스 시대나 동로마 제국을 보는 듯 화려함으로 가득하다. 특히 시즌 2에서 라니스터 군대의 을씨년스러운 전초기지였던 하렌홀의 대강당이 1화 도입부에서 칠왕국의 집정대신들과 대영주들을 비롯한 수백 명의 대협의회장 역할을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드라마의 야심을 가늠케 한다. 성체 드래곤 10마리가 있었다는 나레이션은 기대감을 한층 끌어올리고, 곧장 드래곤을 등장시킬 때의 CG는 두말할 것 없이 좋아보인다. 웨스테로스 전체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타르가르옌 왕조의 위엄이 비주얼적으로 훌륭하게 드러난다. 이미 그간 OTT 드라마들을 통해 눈이 높아졌는데도, HBO의 영상미는 아예 결이 달라보이는 느낌이다.
숀 빈의 에다드 스타크처럼 쇼의 시작을 이끌어갈 대표 네임드 배우가 없는 것은 약간 아쉽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맷 스미스, 패디 콘시딘, 리스 이판 등 영국 드라마와 영화의 팬이라면 익숙한 중견 배우들이 개성 있게 무게를 잡아주니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특히 진 주인공이었던 티리온, 존 스노우, 대너리스를 연기한 피터 딘클리지, 킷 해링턴, 에밀리아 클라크를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이 <왕좌의 게임>을 통해 스타가 된 만큼, 이 드라마에서도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기대해 볼 만하다. 어린 라에니라 타르가르옌을 연기한 신예배우 밀리 알콕의 경우 맷 스미스에 뒤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준다.
(*이하 1화 내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직 1화뿐이라 내용도 별것 없지만 앞으로의 전개에 있어 차이점은 확실할 것 같다. <왕좌의 게임>은 철왕좌를 둘러싼 수많은 가문들의 각축전이었다. 시즌 1 1화에서 얼굴도 모르고 만리타향에 있던 존 스노우와 대너리스가 기나긴 여정을 통해 시즌 7에서 만나는 것 같은 드라마틱함이 있었다. 반면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말 그대로 타르가르옌 가문의 집안 싸움이 국가적 스케일로 번진 경우다. 그를 대변하듯 1화의 거의 모든 내용은 칠왕국 수도 킹스랜딩과 레드 킵 안에서 벌어진다. 1화의 인물들을 극의 중심이라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인물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 대륙과 그 너머를 포괄했던 복잡함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작품만의 오리지널 요소도 많아 보인다. 원작인 <불과 피>는 어디까지나 역사서일 뿐이고, 역사서와 소설은 내용의 밀도에서 큰 차이가 있으니까. 이 점에서 과감하면서도 뛰어난 각색을 보이는 것은 '용들의 춤'의 두 주인공인 라에니라 타르가르옌 공주와 알리센트 하이타워의 나이를 비슷하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원래 사이가 좋았지만, 원작에서 알리센트는 라에니라보다 나이가 10살 이상 많았다. 그만큼 더욱 돈독한 우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후의 파국이 부르는 비극성을 강하게 대비시키려는 듯하다.
또 하나는 왕들의 치세와 권력투쟁을 다루느라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비세리스 1세의 왕비 아엠마 아린의 죽음이다. 그녀는 이미 다섯 아이를 잃었으나 왕비로서 사내를 낳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일곱번째 임신을 한다. 하지만 산통이 심각해짐에 따라 왕인 비세리스 1세는 산모와 아기 둘 다 죽게 두느냐, 혹은 아기만이라도 살리느냐를 두고 후자를 선택한다.
이에 따라 아엠마는 제왕절개 과정의 쇼크로 사망하게 되고, 드라마는 이 과정에서 여성의 음부 형태를 띠고 있는 마상시합장의 관중석 속에서 남성들이 흉흉한 폭력을 벌이는 장면들을 교차편집으로 비춘다. 귀족이라 해도 가문의 적통을 낳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중세 여성과 이를 향한 남성위주 사회의 시대적인 폭력을 단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더불어 라에니라와 동년배로 설정된 알리센트가 훗날 아버지뻘인 비세리스 1세의 후처가 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반면 개작이 지나치게 PC를 의식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다. <왕좌의 게임>의 라니스터 가문처럼 당시 칠왕국에서 왕의 외척으로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벨라리온 가문이 흑인으로 설정된 것이 그 예다. 유럽의 역사와 혈통주의에 특히 많은 모티브를 삼아온 이 프랜차이즈에 흑인화는 좀 뜬금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역사도 아닌 판타지에서 인종 설정 따져봐야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외척이라는 건 왕비가 속한 가문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타르가르옌 왕가의 왕족들부터 전부 흑인 혼혈이어야 했다. 전작 왕좌의 게임의 경우 최소한 몰입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개연성은 지켰었는데 이 경우 설정파괴로 여겨질 공산이 크다. 물론 이 쟁점은 드라마가 이러한 설정변경을 원작팬들에게 얼마나 잘 납득시키느냐에 따라 해소될 수도 있다(사실은 영주인 코를리스 벨라리온이 양자였다가 적자로 인정받았다는 오리지널 설정일까?)
아무튼, 티저 공개 이후 부풀어오른 기대감을 상당 부분 만족시키는 프리미어였다. 용들의 춤 자체는 2년가량 벌어진 짧은 전쟁이었으나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의외로 리미티드 시리즈가 아닌 시즌제다. 아마 성장과정과 왕위다툼 이전 인물들의 갈등까지 세밀하게 보여주려는 심산 같은데, 그 모두를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지가 관건일 듯하다. 예고편 속에 드러나는 스케일은 대작 전쟁영화 부럽지 않고, 라민 자와디의 사운드트랙은 여전히 ‘에픽’하다. 웨스테로스의 이야기를 기다려왔던 팬들이라면 킹스랜딩과 레드 킵의 건재한 외양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 절대반지처럼 모두의 갈망의 대상인 철왕좌는 원전에 맞게 더 거대하고 무시무시해져 그 자체가 권력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이 반가움을 넘어 프리퀄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린 좋은 작품이 나와주었으면 한다. 드라마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메인 테마곡과 오프닝이 없다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