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롭지만 가장 정신없었던 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커트 보니것의 SF 고전 문학 제5 도살장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도서이기에 읽지는 않았어도 제목은 대부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풍자와 블랙 유머로 무장한 부조리와 모순의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반전(反戰) 소설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인 빌리의 시간 여행이 너무 무작위로 발생하여 읽기에 쉽지 않았지만, SF 소설의 거장으로 알려진 작가라는 명성과 세계문학 타이틀을 믿고 끝까지 읽어보시길 바라며 서평을 시작한다.
2. 커트 보니것 작가 소개
1922년 미국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 폭격을 겪었다. 1952년 『자동 피아노』로 등단하였고, 1969년 참전 경험을 그대로 녹여 『제5 도살장』을 출간하면서 미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반전(反戰) 작가로 발돋움했다. 대표작으로 『마더 나이트』, 『고양이 요람』, 『나라 없는 사람』, 『타이탄의 세이렌』, 『갈라파고스』, 『카메라를 보세요』 등이 있다. 2007년 자택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고 몇 주 후 하늘의 별이 되었다.
폭격 당시 드레스덴 출처 : 나무위키
3. 드레스덴 폭격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대전 때 드레스덴에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네 번의 공습이 있었다. 이때 영국 공군 소속 중폭격기 722대와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 중폭격기 527대가 3,900톤 이상의 고폭탄 및 소이탄을 드레스덴에 투하했다. 폭격과 그로 인해 발생한 화염 폭풍으로 도심이 파괴되었으며 25,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자는 알 수 없다. 제5 도살장은 이 공습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현재 커트 보니것의 제5 도살장과 연계하여 드레스덴 시티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야간 산책을 통한 문학 투어로 구성되어 있다.
총 10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1 챕터와 10 챕터는 작가 본인(아마도)이 화자로 나온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책을 쓰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동료를 만나러 갔고 그의 아내에게 굉장히 냉대받는다. 그 이유는 전쟁 영웅에 관한 내용으로 쓰게 되면 다음 전쟁이 났을 때 이를 바탕으로 자신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부모의 아이가 참전할 근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서였다. 이에 나는(화자) 말한다. 절대 그런 내용도 아니며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2장부터는 제5 도살장의 실질적인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등장한다. 그는 가느다라며 왜소한 몸을 가진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도 그가 제대로 총을 잡고 전투에 뛰어드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얼떨결에 전장으로 가게 되었지만, 가는 날 그곳의 동료들이 다 죽어버려 오히려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후 드레스덴에 폭격이 발생하고 며칠 뒤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 시간에서 풀려났으며(자유자재로 시간 여행이 가능함) 이후 트랄파마도어라는 곳의 외계인에게 납치당한다. 이들은 미국의 유명 여배우도 잡아 와 빌리와 강제로 가족을 만들고 번식시키며 그곳 동물원에 전시한다. 이야기는 빌리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끝난 후 죽는 시간까지 무작위로 시간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일생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전쟁의 참상과 영웅적인 인물로 나오지만,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는 인물에 대한 부조리를 독자들에게 꾸준히 말한다.
5. 이 소설이 반전 소설인 이유 : 전쟁으로 인한 PTSD
작품 속에서 유의미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은 두 명이다. 먼저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곳에서 고작 찻주전자 하나 가지고 나와 총살당한 전쟁 영웅이다. 전범도 아닌 이런 사람을 겨우 절도죄로 총살한 부조리함은 논외로 하자. 그가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굳이 절도를 왜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전쟁에 어울리는 인물인데 말이다. 그래서 드레스덴에 폭격이 일어난 후 그의 정신은 이미 무너졌던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다음으로 언제나 시간 여행을 하는 빌리이다. 자신이 보기에 그다지 큰 사안이 아니라고 여겼고,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인 에드거 더비를 총살했다는 것에 이미 정신 이상이 생긴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격이 끝난 드레스덴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져 재만 남았으며, 더불어 살아남은 이조차 이렇게 미친 판결로 죽여버렸다. 게다가 이것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그를 묻어준 빌리의 정신이 무너져 PTSD 증상이 생긴 것이며, 그 결과 그는 무한정 시간 여행을 하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6. 빌리의 시간 여행에 관한 고찰
가장 먼저 객관적인 사항부터 살펴보자면 그의 시간 여행은 그가 살아왔던 인생 안에서만 가능하며 절대 부수적인 사안이나 결과에 변화가 없다. 게다가 자신이 암살자에 의하여 불합리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경험한 후에도 그것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하는 시간 여행은 단순히 기억에 대한 이동일뿐, 앞부분에서 거창하게 말하는 몇 가지 차원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러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과연 빌리가 정말 시간 여행을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과정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낼 때 분명히 4차원의 눈을 가진 트라팔마도어인을 연결하며 상당히 과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 작품이 SF 소설이라고 할 만큼. 그런데 작중에 그는 이들을 만나기 1년 전에 이미 시간 여행을 하고 다닌 것으로 나온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그가 시간 이동을 할 때 특정한 조건이 있어야 하며 그 과정이 일정한 공식이 있어야 하는데 과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작위적이었다. 작중 마지막에 소설가인 킬고어 트라우트의 책에 대한 줄거리 또한 이를 뒷받침해 준다.
세 번째로는 그의 시간 여행의 진실성을 배제하고 실제라고 가정해 보자. 보통 자신이 시간 이동을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같은 인생을 수십 번 살았다면 누구나 조금은 바꾸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지루함에 대한 감정이나 변화에 관한 의지가 전혀 없이 오로지 시간 속에서 부유할 따름이었다. 죽음이나 소멸 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꼭 붙는 '뭐 그런 거지'가 무려 106번이나 나온다. 처음에는 이 말이 시니컬하게만 느껴졌는데 책장이 넘어가면서 동일한 상황을 너무 많이 겪어 무감각해진 것이 아닐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단순히 같은 상황을 여러 번 겪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기보다 마치 같은 영화를 수백 번 본 것 같은 느낌의 어조로 다가온다. 무작위적이며 바꾸지 못하는 시간 여행이라면 결국은 기억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니체의 영원 회기로 이어진다. 똑같은 인생을 영원히 살아도 좋을 만큼 제대로 살라는 영원 회기. 만약 당신이 이런 시간 여행을 죽음 없이 영원히 해야 한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5 도살장은 수백 번을 다시 살아도 좋은 인생이란 어떤 것일지 하는 고민을 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지지배배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