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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탈을 쓴 엘렉트라, 윤리의 살해자가 되다

by 야담


1. 신화 이야기




트로이아 전쟁에 나선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항구에서 출범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불어주지 않았고 갑작스럽게 돌림병까지 돌아 병사들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는 점쟁이 칼카스를 불러 그 이유와 상황을 타개할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유는 아가멤논이 사냥에서 잡은 사슴 때문이었다. 그 사슴은 아르테미스 여신께 바쳐진 사슴이었고 여신의 진노로 인해 현재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해결 방법은 사냥을 한 사람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아가멤논은 자신 때문에 거사를 망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딸 이피게네이아를 불러들여 제물로 바치려 한다. 그 순간 아르테미스가 그녀를 데려가 여사제로 삼고 제사용 제물로는 사슴 한 마리를 대신 준다. 이렇게 전쟁에 나간 그리스 군은 승리를 거두고 아가멤논은 전리품으로 카산드라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피게네이아가 사제가 된 신전에는 죽은 소나무가 자라났고 이 나무는 건기와 우기에 따라 한 번씩 죽었다가 살아나기를 반복한다고 전해진다.



아가멤논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딸 엘렉트라는 어머니 클리타이메스트라가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동생 오레스테스를 타국으로 보내버린다. 이들은 둘의 사랑을 위하여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공모하였다. 카산드라와 함께 돌아온 남편을 보고 클리타이메스트라는 눈이 뒤집혀 계획대로 두 사람 모두를 죽인다. 이 사건 이후 엘렉트라는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며 멀리 보냈던 동생을 불러들이지만 그녀에게 날아온 소식은 동생의 사망 소식이었다.



절망의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두 남자가 항아리를 들고 엘렉트라를 찾아온다. 그녀는 더욱 큰 절망에 빠지지만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오레스테스였다. 엘렉트라는 계획을 세우고 오레스테스는 실행에 나서어 어머니와 아이기스토스를 모두 죽인다. 그 결과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가 오레스테스를 미치게 만들고 그는 이 나라 저 나라로 쫓겨 다니게 된다. 그의 친구 필라데스는 늘 그를 곁에서 돌보아 주었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키티아 지방 타우리스로 가서 하늘에서 떨어진 아르테미스 상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방인을 아르테미스 여신의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던 타우리스인들은 두 사람을 잡아 여신에게 바치려 한다. 천만다행으로 그곳의 여사제가 바로 누나인 이피게네이아였다. 덕분에 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여신상을 찾아 고향인 미케나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엘렉트라는 동생의 친구 필라데스와 결혼하게 되고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는 자비로운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모하게 된다. 심리학자 칼 융은 딸이 아버지에게 집착하고 어머니에게 적대감을 가지는 심리적 현상을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정의하였다.




2. 신화와 문학




엘렉트라 신화는 어머니에 대한 적대와 아버지를 향한 복잡한 충성 그리고 피로 연결된 가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윤리적 파국을 담고 있다. 이 구조는 ‘엘렉트라’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도 수많은 현대 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왔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가족 단위마저 해체되는 극한 상황에서 윤리와 복수의 경계가 흐려지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어떤 윤리적 원칙도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판단을 내려야 하며 누군가는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엘렉트라가 감정적으로는 정당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애매한 복수를 선택했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정당한 폭력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돈 드릴로의 이트 노이즈는 핵가족 내부의 균열을 배경으로 죽음과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집착을 다룬다. 여기서 엘렉트라 신화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가족 간에 교차하는 불신, 과도한 집착, 죄책감이 만들어내는 공포의 구조는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이야기와도 닮아 있다. 특히 아내 바베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감행하는 행동은 엘렉트라가 복수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극단의 선택과 구조적으로 겹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엘렉트라 신화의 반대편에서 응시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의식이 없다. 그는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감정적 명분에도 기대지 않으며 오직 사실만을 살아간다. 반면 엘렉트라는 복수와 정의, 죄와 책임에 대한 감정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은 엘렉트라가 끝내 직면했던 내가 저지른 행위에 어떤 윤리가 따르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무정하고도 냉철한 방식으로 대답한다.



이렇게 엘렉트라 신화는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가족의 균열, 복수의 윤리, 죄와 감정의 교차점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현대 문학의 내부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3. 고찰




엘렉트라 신화는 사랑과 증오, 정의와 죄, 가족과 복수의 개념이 서로를 교차하며 무너지는 이야기다. 엘렉트라는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한 후 단순한 혐오가 아니라 의무처럼 복수를 선택한다. 그녀에게 복수는 감정의 발현이 아니라 가문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실천이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또 다른 파괴를 낳았고 가족은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 신화를 통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복수는 악을 제거하지만 죄는 남긴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처단하는 일은 외부의 시선에서는 정당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위가 자식의 손으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관계 자체의 파열로 이어진다. 인간은 타인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것이 부모일 때 그 심판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엘렉트라의 선택은 이 질문에 대한 고통스러운 응답이다.



신화는 또한, 복수가 끝나면 죄의식도 끝나리라는 단순한 도식을 부정한다.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완수했음에도 에리니에스의 저주를 받는다. 그가 심판한 것은 가정의 범죄였지만 그 방식은 신의 질서를 거스른 행위로 간주된다. 엘렉트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복수 후 평온을 얻지 못하며 죄의 전가와 책임의 경계를 끊임없이 떠도는 인물로 남는다. 복수는 그 자체로 종결되지 않는다. 정의의 얼굴을 한 죄는 또 다른 정의를 불러내는 법이다.



엘렉트라 신화는 가족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쉽게 윤리의 파열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가정은 가장 안전해야 할 울타리지만 피를 나눈 관계일수록 증오의 감정은 더욱 날것으로 분출된다. 엘렉트라는 외부의 적과 싸우지 않는다. 그녀의 적은 내부에 있으며 가장 가까운 혈육이다. 이때의 파괴는 단지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체계의 자멸이다. 사랑이 지닌 기대감이 배신으로 전환될 때 그 감정은 혐오보다도 더 강한 복수를 촉발시킨다.



신화는 마지막에 신의 개입으로 질서를 회복시키지만 그 과정은 인간적 구원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신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적 마무리에 가깝다. 결국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인간의 손으로는 끝낼 수 없는 문제였다. 인간은 정의를 추구하지만 그 정의는 때로 신의 법과 충돌하고 윤리를 넘어서며, 감정의 대가로 돌아온다.



신은 질서를 되찾았지만 인간은 회복할 수 없는 가족과, 판단할 수 없는 죄, 감당하지 못할 감정을 남겼다. 엘렉트라는 그렇게 해서 신화 속 가장 복잡한 인간형이 된다. 그녀는 사랑했고, 미워했고, 복수했고, 고통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이 복잡한 인물을 통해 가족과 윤리,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되묻게 된다.




4. 결론




엘렉트라의 이야기는 신화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뒤엉킨 자리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정의를 실현했으나 죄를 남겼고 가족을 지키려 했으나 가정을 파괴했으며, 끝내 복수의 칼을 들었지만 그 칼끝은 자신을 향해 돌아왔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 묻게 된다. 옳은 행동이 반드시 선한가. 복수는 정의가 될 수 있는가. 가족은 언제 가장 잔인해지는가. 엘렉트라는 그 질문들을 안고 걸어간 인물이다. 신은 질서를 되찾았지만, 인간은 무엇을 잃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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