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가장 먼길
홍시향 가득한 오후의 시작
전혀 무덥지 않았던 한여름 늦은 오후, 마치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태양은 조그만 언덕 마을의 꼭대기에 앉아, 강렬한 홍시 향기를 뿜어냈다.
언덕 중간 즈음, 그 향기를 등 뒤에 품은 채 한 소년이 당당하게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음음, 알 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음음,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 년 전…”
소년은 우렁찬 목소리로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지만, 정작 주위의 반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때,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던 또래의 여자아이가 소년을 보며 킥킥 웃었지만, 소년의 눈에는 그런 순간들이 닿지 않았다.
힘차게 걸으며 노래를 부르는 소년의 시선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전봇대 옆, 먼지가 쌓여 희미해진 낡은 전축의 버튼을 눌러 보고, 담장에 뚫린 휑한 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벽 모퉁이에 흩어진 연탄재를 발로 밟아 보기도 했다.
그는 낮지 않은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지만, 열 걸음도 채 채우지 못해 다시 조금씩 올라가고, 오른쪽 끝으로 갔다가 또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정처 없이 헤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소년의 시선 하나하나, 발걸음마다 담긴 의미는 세상 무엇보다 진지하고 깊었다.
한참을 지나 언덕길 끝자락에 다다르자, 소년 앞에 그가 이제껏 밟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넓고 분주한 큰 대로변이었다.
소년은 두 발을 내딛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한 걸음씩 길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브라보, 아빠의 인생
“착착착착.”
큰 대로변의 인도를 자전거와 함께 흘러가듯 달리는 한 소년이 있었다.
한쪽 차선에서는 수많은 하얗고 노란빛의 눈동자들이 소년을 향해 인사를 건네며 흘러가고, 그 반대편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붉은 눈들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유유히 지나간다.
“붕붕붕, 아주 작은 자동차, 꼬마 자동차가 간다!
붕붕붕,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 자동차!”
소년은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고개를 흔들며 박자에 맞춰 신나게 페달을 밟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에 놀란 소년은 핸들을 급히 틀었다.
“어, 어어어어어억!”
그림자의 외침과 함께 자전거가 급정지하며 넘어졌다.
“끼이익! 쿠당탕탕!”
다행히 그림자를 피하긴 했지만, 소년은 균형을 잃고 도로에 나뒹굴고 만다.
“어떤 놈이냐!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거야!”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구부린 채 건들건들 걸어오는 남자가 있다.
어딘가 모르게 사마귀처럼 비틀거리는 자세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속엔 묘한 익살이 섞여 있다.
“어라? 꼬마 아이잖아?”
혀가 약간 꼬부라진 말투.
그는 트림을 내뱉으며 다시 말한다.
“꺼~억… 야, 이씨. 잘 보고 다녀야지! 아이, 놀래라.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냐?”
소년은 왼쪽 팔꿈치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진 자전거만 바라보고 있다.
자전거는 처량하게 누워 있고, 체인은 제자리를 잃은 채 땅 위에 축 늘어져 있다.
남자는 술 냄새를 풍기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그는 아까의 비틀거림이 무색할 만큼 능숙하고 조심스럽게 소년의 팔꿈치를 감싸 안는다.
“팔을 다친 거야? 어디 보자.”
소년의 팔꿈치엔 긁힌 자국 위로 작고 붉은 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남자는 그 상처를 다정하게 감싸고 나서, 이제야 무언가를 알아챈 듯 자전거를 바라본다.
“아, 체인이 빠졌구나? 잠깐만 기다려 봐.”
‘착착착, 추르륵, 촤르르르…’
마치 마법 같은 손놀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전거는 다시 부드럽게 숨을 쉬기 시작한다.
소년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미소를 본 남자는 마음이 놓였는지 다시금 어깨에 힘을 풀고, 영화 속 취권 고수처럼 몸을 흐느적거리기 시작한다.
“음… 너희 집이 어디냐?”
소년의 미소는 순간 사라지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오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어? 그래?”
남자는 말을 잇는다.
“아저씨 집도 저쪽인데, 아저씨도 같이 가자!”
소년이 동행 제안에 당황할 새도 없이, 남자는 벌써 자전거의 핸들을 잡고 소년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뭐 해? 어서 타지 않고!”
소년은 마지못해 자전거의 뒷좌석에 올라탄다.
그러자 남자는 또 한 번 크게 트림한다.
“꺼~억!”
그리고 자전거는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휘청, 휘청. 비틀, 비틀.
우스꽝스럽게 두 무릎을 날개처럼 펼친 아저씨는 거친 야생마를 길들이는 카우보이처럼 자전거의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자전거는 바람을 타고 자연스럽게 물결을 따라 흐르기 시작한다.
그제야 안정된 듯, 남자는 다시 흐느적거리며 소년에게 묻는다.
“너희 아버지는 뭐 하시냐?”
잠시의 정적 끝에, 소년이 조용히 대답한다.
“책 찍어요…”
“인쇄? 아저씨랑 같은 공돌이구나!”
남자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덧붙인다.
“아저씨도 공장에서 일해. 멋진 옷들을 만들지!”
그리고는 한동안 말없이 멀리 빛의 물결을 바라본다.
“아저씨, 술 마셨어요?”
소년이 묻는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마셨지. 오늘 월급도 받고… 그리고… 돈도 좀 땄거든.”
말을 멈춘 그는 주머니 속 반쯤 접힌 얇은 봉투를 조심스레 만진다.
소년은 다시 묻는다.
“술 마시면… 좋아요?”
멍하니 묻는 소리에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 되묻는다.
“너희 아버지는 술 안 마시니?”
“아빠는 잘 모르겠고… 엄마는 가끔 마셔요.”
소년의 대답에 담긴 조심스러움.
그는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곧, 도로 위를 흐르는 빛줄기들이 껌처럼 길게 늘어지며 그의 시선을 붙잡는다.
‘착착착착, 착착착착.’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춘 자리를 대신해, 자전거가 리드미컬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 소리에 맞춰, 남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워은더푸울~ 워언더풀~ 아빠의 청춘~ 브라보오~ 브라보오~ 아빠의 인생~!”
음정도 박자도 엉망이지만, 흥에 취한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다.
소년은 노랫소리와 함께 풍겨오는 술 냄새에 문득 새엄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저씨의 허리를 부여잡은 두 손끝에 느껴지는 기계기름 섞인 땀 냄새에 아빠의 얼굴이 겹쳐진다.
조용한 작별, 작은 손의 온기
“안녕, 강아지?”
소년은 한산한 골목길 입구, 조그마한 구멍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떠돌이 개와 마주하고 있었다.
개는 오랜 떠돌이 생활로 지친 듯, 다리 사이의 털은 엉겨 붙고, 퀭한 눈은 말라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맑고 큰 눈엔 그 모습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소년에게 중요한 건 오직 상상력의 문을 여는 일.
상상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존재든지 그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소년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손을 내민다.
개는 잠시 먼 곳을 응시하더니, 마지못해 소년의 눈을 바라본다.
새로운 상상으로 반짝이는 눈과, 더는 기대할 것도 없는 지친 눈이 마주친다.
그 짧은 교차 속에서, 소년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개는 그 시선을 이내 피해버린다.
소년은 아쉬움을 담아 묻는다.
“너는 집이 어디니?”
개는 대답 대신, 조용히 소년의 손을 세 번 핥고는 천천히 멀어져간다.
소년은 개가 남기고 간 따뜻하고 축축한 손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나는 오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날 거야…”
그 순간, 꽉 쥔 소년의 주먹이 점점 커지는 그림자를 만들고
그 그림자는 세상을 천천히 덮어 나간다.
그것은 나만의 세상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한낮의 빛 속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며 모든 것을 삼켜 간다.
세상은 금세 어둠으로 덮인다.
그림자들은 배가 부르기라도 한 듯, 까만 밤하늘 위로 퍼져 눕는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빛의 눈동자들이 하나둘 깨어난다.
잠에서 깬 빛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비추고, 제 빛깔로 세상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소년은 웃고 있다.
어둠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그 속에서 소년은 새로운 놀이를 시작한다.
밝은 빛을 따라 달려가고, 어둠이 드리우면 다시 다른 빛을 찾아 달린다.
이 끝없는 놀이 속에서 소년은 지치지 않는다.
빛깔이 다양한 만큼, 이 놀이는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러다 소년은 두 집 사이의 작은 틈에 멈춰 선다.
그곳엔 허름하고 낡은 자전거 한 대가 하얀빛에 감싸인 채 조용히 놓여 있다.
소년은 그 앞에 서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커다란 서류가방을 든 아저씨,
양손 가득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가는 아주머니,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는 배달부 아저씨…
모두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 누구도 소년과 그 자전거를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순간, 소년은 자전거의 핸들을 붙잡는다.
누군가가 잃어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자전거.
그것이 이제 그의 세상이 된다.
소년은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세차게 페달을 밟는다.
그의 속력에 맞춰 체인이 낡은 소리로 울린다.
챙챙챙챙…
조용한 골목길이 자전거 바퀴의 노래로 하나씩 채워진다.
길 잃은 아이가 아닌, 떠나는 여행자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소년은 아무도 밟지 않은 어두운 골목길을 힘없이 걸었다.
마치 모든 마법력을 다 써버린 마법사처럼,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축 처진 어깨와 힘없는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해 나아갔다.
누구도 소년의 배고픔을 채워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소년에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다만 낮 동안 따뜻하게 데워진 대지와, 아무도 바라보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가로등들만이 소년을 감싸 안아주었다.
어느덧 소년은 낮은 언덕 위 조그만 놀이터에 다다랐다.
가로등 하나가 놀이터 한가운데 긴 의자를 비추고, 그 주변 어디에도 다른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긴 한숨을 내쉬고, 신발을 벗어 의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등을 뉘였다.
가로등 불빛이 소년의 온몸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소년의 몸은 무언가에 기댄 듯, 따뜻함에 감싸인 듯 서서히 상상의 마법력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나섰다.
오랜 시간 변치 않을 것만 같던 가로등의 눈빛과, 다시 살아난 소년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보았다.
그 마주침에,
가로등은 수백 마리의 날개 달린 조그만 춤의 요정들을 불러들였다.
요정들은 각자의 등에 따뜻한 빛을 머금고 멈추지 않는 영원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쁘게도, 잘 짜여진 듯, 그렇지 않은 듯, 그 춤은 끝없이 이어졌다.
‘깜빡깜빡깜빡.’
가로등이 깜빡이며 2막의 시작을 알렸다.
요정들은 빠르던 춤사위를 천천히 늦추며, 아름다운 빛의 꼬리를 남겼다.
빛을 잃은 요정 하나가 천천히 내려와 소년의 귓가에 앉았다.
“너는 집이 어디니?”
소년은 가로등을 응시한 채 물었다.
“집이 뭐야?”
힘없는 요정의 속삭임에,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
소년이 눈을 뜨자, 무대는 이미 끝나고 요정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는 수많은 하루살이들이 빛을 머금으려 다투는 모습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커다란 파란빛과 빨간빛의 공들이 놀이터를 빠르게 튕기며 누볐다.
언덕 아래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다가왔다.
‘치~익, 칙, 칙, 치익.’
신호를 잃은 라디오 소리가 퍼졌다.
그림자가 길게 뻗어 소년의 발끝까지 다가왔다.
갑자기 밀려오는 공포에 소년은 가로등 아래 그대로 얼어붙었다.
“얘야, 너희 집이 어디니?”
“집 전화번호는 아니?”
젊은 순경이 맨발로 선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년은 정면만 바라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경의 질문엔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순경은 무전기를 들며 말했다.
“김 경사님, 여기 놀이터에 길을 잃은 아이가 있습니다.”
길을… 잃은… 아이…
그 말이 소년의 귓가를 맴돌았다.
조그만 열쇠가 되어 소년 머릿속 깊은 곳의 검은 상자를 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소년의 계획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상…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듯, 소년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소년의 맨발은 대지의 수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계획들은 요정들의 춤의 무대로 변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던 물방울은 깊은 물결이 되어 어느새 소년의 가슴팍까지 올라왔다.
소년은 절대 길을 잃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직접 그려온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소년은 바꿀 수 없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원하는 새로운 세상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소년만 알고 있었다.
남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소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의 첫 번째 도전,
꿈을 향한 첫걸음을 무너뜨리는 상자를 연 그 열쇠는
소년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했다.
‘나는… 길을 잃지 않았어요.’
소년은 외치고 싶었지만,
물결은 목젖까지 차오르고,
입술만 떨릴 뿐 모든 소리를 삼켜버렸다.
눈물이 눈동자의 빛을 녹이며 흘러내린다.
하나, 둘, 셋…
소년의 눈이 열렸다.
얼마나 오래 참아왔을까.
뜨거운 눈물이 소년의 아픔을 씻어내며 하염없이 흐른다.
“윽… 으으으… 윽으으… 으앙… 으아앙…”
갑작스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 너머로 불빛만 일렁일 뿐이었다.
소년은 울음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여행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울음을 멈출 수 있을까?
소년은 늘 그래왔듯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떠오르는 사진들…
텅 빈 어두운 방, 술에 취해 울다 잠든 새엄마, 떠나버린 형, 가끔 볼 수 있는 아빠…
소중한 기억은 눈물에게 모두 빼앗긴 듯,
소년 머릿속은 슬픈 사진들로 가득했다.
“어엉엉엉… 어엉어엉… 어어어어엉…”
소년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해도, 사랑해도, 남는 건 남고 사라질 것은 사라질 뿐이었다.
새로운 것만 남고, 지난 것은 흩어지는 법이었다.
소년은 이미 깨달았다.
아프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받아들이고, 얼마나 많은 게 떠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 떠들며 놀 수 있는 세상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 세상은 과연 있을까…
대지의 모든 수분을 빨아들이고 흘려보낸 소년의 몸이 점점 힘을 잃었다.
그 순간,
텅 빈 머릿속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눈을 마시며, 몸이 떨리기 시작할 때쯤…
따뜻한 포옹이 느껴졌다.
세상 무엇보다 포근하고 달콤한 포옹이었다.
소년의 감각들이 하나둘 엮여갔다.
코를 타고 흘러드는 씁쓸한 박하사탕 향,
멘솔 담배 향이 소년의 코를 콕콕 찔렀다.
아빠 담배 심부름을 가며 골라온 과자 냄새,
아빠 옆에서 맛보던 그 달콤한 기억…
아빠, 새엄마와 함께 깔깔대던 따뜻한 오후가 떠올랐다.
가족의 그리움에 소년은 새로운 것을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하나, 둘, 셋.
소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아저씨…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데려다 주세요…”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며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꿈에서 깨어, 다시 집으로
“아빠!”
“아빠, 아빠! 아빠!!!”
누군가 억지로 내 두 눈꺼풀을 치켜 올린다.
“음음, 어어, 음… 하지 마~.”
잠시 보인 하얀 천장과 기억의 퍼즐이 순식간에 맞춰졌다.
늦은 일요일 아침, 침대에 누워 늦잠을 자고 있는데,
둥근 두 아들의 동그란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으음… 엄마는?”
“엄마 운동 갔어~.”
“으으음… 그래?”
“아빠, 꿈꿨어?”
“응? 음… 꿨던 것 같은데…”
무슨 꿈인지 장황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좋은 꿈이었어? 나쁜 꿈이었어?”
“으응? 잘 기억이 안 나네. 좋은 꿈이었던 것 같아.”
“아빠, 배고파! 빨리 밥 먹자.”
“그래, 먼저 내려가 있어. 금방 따라갈게.”
“응!”
대답하자마자 들려오는 네 개의 발굽 소리.
마치 소떼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계단을 세차게 두드리며 내려간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과 조근조근한 새소리가
어제의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준다.
조금 길었던 단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움직이는 몸을 일으키며,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맞다. 바로 이곳, 이곳이 나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