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스키 Sep 05. 2021

일해라절해라 하는 사람은 모르는개산책

백번일지-등산일기

준비 없이 비를 만난 날


습하고 뿌연 새벽이었다. 산길이 어두워서 뿌연 줄 알았다. 계절이 지나가느라 어둠이 늦게 걷히는 줄 알았다. 산 중턱을 지나는데 머리에 뭔가 툭툭, 떨어진다. 나무가 간밤에 맺힌 이슬을 털어내는 줄 알았다. 어깨에 툭툭이던 것들은 이내 타다닥, 타다닥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듣던 오디오북 BGM으로 빗소리 ASMR이 깔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일곱 시부터 내릴 거라고 했었다. 그리고 내리다 말다 하는 날이라고 했다. 빗줄기가 굵어진 여섯 시는 예상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면 약속의 시간 일곱 시가 되면 더 많이 온단 말인가. 기상청은 나의 약속이 여섯 시인지, 일곱 시인지 관심이 없다. 따지면 한두 시간 차이는 오차범위여서 책임 없다고 할 것이다. 비가 오는데, 내가 따져서 뭐할 것인가. 또 기상청에 책임이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새벽 산에서 준비 없이 비를 맞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대응뿐이다. 예측보다 대응이 중요하다는 것은 주식 격언. 인생은 알 수 없는 주식과도 같다. 주식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대응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입산을 하지 않았다면 준비 없이 산속에서 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묘한 해방감


조금 숨도 차오르던 김에, 비도 오겠다, 하산하기로 했다. 정상이 아닌 중턱에서 돌아서는 순간 묘한 쾌감이 일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자각이 든, 순간에 감사했다. 이래라저래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보호받지 못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온전히 감당하는 삶.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자유의 기쁨이 나뭇잎에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흘러넘쳤다.


비가 올 줄 알면서, 굳이 산을 타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하산하는 동안 우산을 쓰고 등산하는 사람들을 많이 지나쳤다. 그들이 집에서 눈곱을 떼고 주섬주섬 등산복을 걸칠 때만 해도, 비가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등산을 시작했고, 그들은 우산을 준비했다. 나는 비가 내릴 줄 알았다면, 등산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우산을 준비할 열정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열정의 부족이 부끄럽지는 않다. 부끄러울 일도 아니라는 게,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괜히 싸우다 카톡방 나가지 말기


등산에 흥미가 없다면 새벽 등산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애매한 차이지만, 우중 산행은 더더욱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미쳤다고 하는 게 뭐가 중요한가. 피곤을 깨고 일단 새벽 등산에 나서면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어떤 생각이든 하나라도 떠올라 이런 글도 쓴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이 늘지만 자유가 생긴다. 어릴수록 오지랖 담은 조언을 많이 듣게 된다. 삶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형편없는 참견도 많이 포함해서. 주위에 '이래라저래라'를 '일해라 절해라'라고 쓰는 주제에, 참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인간관계를 '모르는 개산책' 이다. 모르는 척할 수 없다면,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그 인간 자체를 모르는 게 상책이니까.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그 당연함은 누가 정했는가. 당연하지 않아 보이는 저 남들은 세뇌되었으나, 정의로운 나는 세뇌되지 않은 것인가. 당연함에 대한 착각은 싸움을 부른다. 의미 없는 분노로 사회적 에너지가 낭비된다. 정체 없는 혐오는 정처 없는 시간낭비를 낳는다.


어차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정하게 누군가에게 조언해줄 때 조심해야 한다. 꼰대의 다정한 인생 조언도 당연히 들을 의무가 없다. 이 생각을 벗어나기 시작하면 묘한 해방감이 스며들 것이다. 현실 꼰대 만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당신과 싸우는 그 사람이 일해라절해라 뭐라 하든 피하는 개산책이다. 그 사람은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러니 카톡에 정치적 뉴스 하나 올리고 치고받고 싸우고 홧김에 방 나가고 그러지 말자.


최고의 동료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궁술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눌 벗을 찾을 때는 직관을 믿되 타인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라.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한계를 기준 삼아 타인을 판단하고, 그들의 의견은 편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다.

파울로 코엘료, 『아처』


책임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


비가 오는 새벽 산에서 하산할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이 산속은 머릿속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산속에 들어온 것이다. 우산도 없는데 산에서 갑자기 비를 만난다면, 선택은 두 가지다. 그냥 하산 하기와 그냥 끝까지 가기. 끝까지 가든, 뒤돌아 가든 아무도 관심이 없다. 누군가 다정한 관심을 보일지라도 그가 책임질 일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해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때 자세히 들어봐야 한다. 누군가가 이래라저래라 하던 목소리는 아닌지.


어떤 생각의 산속으로 누가 시켜서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어깨를 두드리는 빗방울이 아니라 산자락을 온통 적시는 비구름이 보인다. 그때 비로소  '내 생각 속의 나'를 바라보는 존재가 생각의 주인이 된다. 이 산속에서, 생각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나를 알아봐 주는 일. 이것이 우리를 둘러싼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다. 비는 지나가지만 그 사람은 평생 함께할 테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냉정과 열정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