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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스키 Aug 09. 2016

모험 총량의 법칙

내 삶의 프레임, 나는 내 마음 잘 쓰고 있는가 


지랄 총량의 법칙


신통방통한 법칙이 하나 있다.

"지랄 총량의 법칙"

좀 방정맞긴 하지만 굉장히 히트한 법칙이다. 김두식 교수의 책에서 언급된 후 여러 칼럼에 인용된 것은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감했다. 법칙의 보편성과 용어의 신박함이 맞물린 지랄 총량의 법칙.

특히 지랄 맞은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받아본 직장인들이라면 완전 공감한다. 이직을 하더라도 지랄 맞은 상사는 있게 마련이라며, 만약 없다면 내가 그 지랄을 담당하고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며.. 어떤 조직이든 전체적 지랄성을 높이는 존재가 있다는 말에 폭풍 공감을 하지만, 사실 이 용어는 그런 뜻이 아니다. 개인의 지랄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유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입니다. 어떤 살마은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서 그 양을 소비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춘기 자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다 자기에게 주어진 '지랄'을 쓰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도 했습니다. 사춘기에 호르몬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이었습니다.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이런 법칙의 묘미는 의미를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 나의 지랄성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어딜 가나 존재하는 지랄 맞음의 향연에 지친 이들에게 한줄기 힐링의 용어가 된 것이다. 그래도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용어가 포괄할 수 있는 개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험 총량의 법칙


나는 '모험 총량의 법칙'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이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모험이 끝난 뒤의 허탈 혹은 안정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다.  



'사회적' 모험 총량의 법칙이 있다.

모든 탈 것은 자리가 정해져 있다. 무한정 많은 사람이 탈 수도 없고 무한히 실어 나를 수도 없다. 유명한 유적으로 가는 버스 통행량은 한정적이고 주차장도 관광지의 크기보다 크지는 않다. 어떤 명소도 여행자들을 수용하기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그랜드캐년에 관광객이 몰리더라도 발 디딜 틈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여행이라 부르는 것들의 매력은 그 시공간을 자랑하는 데에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시대 모험가들이 나의 영웅담을 뽐내는 데 열을 올리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내 성공적인 모험담에 귀를 기울여줄 누군가가 항상 있다는 건 정말 매력적인 일. 누구나 다 모험하고 언제나 다 여행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자랑의 명분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세상이 수용할 수 있는 모험의 울타리에는 언제나 경계가 있으므로.



'개인적' 모험 총량의 법칙도 있다.

모험의 울타리, 그 한계를 사회적 모험 총량의 법칙이 결정한다면, 울타리가 붐비는 정도는 개인적 모험 총량의 법칙에 좌우된다. 사회적 측면의 모험 총량이 한 시점에서 보는 횡적 차원이라면 개인적 모험 총량은 일생을 지켜보아야 설명되는 종적 영역이다.  


누구에게나 모험은 있다. 모험이 가능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는 어떤 시기가 일생에 한 번쯤은 온다. 삶의 단계마다 모험의 정도가 다른데, 그 모험들의 총량은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모험을 하기로 했던 결단의 순간을 그리워하거나 여행의 추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이벤트가 적기 때문이다. 모험이 반복되면 지치게 되고, 여행이 지속되면 권태기가 오게 마련이다. 여행이 찬란했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건 흔하지 않은 이벤트의 기억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일 뿐.


내 삶의 법칙, 프레임


모험기를 지난 이후엔 안정기를 추구할 수도 있다. 모험을 충분히 했던 만큼 이제는 변화가 적은 삶을 택해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모험을 추구하는 이들이나 여행에 중독된 탐험가들은 모험의 총량에서 할당량을 다 채웠음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험 총량의 법칙은 정말이지 허접한 법칙이 아닐 수 없다. 내 모험의 총량도 내 의지로 늘리고 줄일 수 있고, 법칙의 한계선도 마음대로 그을 수 있다. 


나만의 모험이라는 것은, 일종의 삶의 법칙이다. 내 행복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행복의 프레임.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삶이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행복해지는 프레임을 만들어 거기에 맞추어 살도록 노력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는 스스로의 삶과 의지를 법칙을 만들어 설명할 수 있다. 법칙에 따라 세상을 본다는 것은 삶의 프레임을 만드는 작업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저서『프레임-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에서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라고 했다.


나는 가끔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단 하나만 고른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심리학자로서 일종의 '18번'을 묻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프레임'을 선택한다. '프레임'이야말로 우리 마음에 깔린 기본 원리이면서 동시에 행복과 불행, 합리와 비합리, 성공과 실패,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상생과 갈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프레임을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마음 설명서'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최인철 , 『프레임-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에필로그 "프레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중에서


그렇다면 프레임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  "10년 후에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프레임』에서는 이상적인 생활을 상상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다고 한다. 당장 내일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의미 있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장 내일과 지금의 일상도 내 삶의 법칙으로 프레이밍 되어야 한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미래나 현재의 일도 늘 상위 수준으로 프레임 해야 한다. 일상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마치 그것을 먼 미래에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중심으로 프레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어떤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당신은 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 것은 지혜로운 물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10년 후와 같은 먼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의미 중심의 이상적인 생활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의 청사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10년 후쯤엔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다니고, 주말에는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때론 나보다 못한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겠죠."라고 답한다.

그러나 자녀의 배우자감이 어떤 사람인지, 혹은 신입사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당장 내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막연한 먼 미래가 아닌 내일 당장의 삶을 의미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부모가 원하는 자녀의 배우자감이고, 회사의 인재인 것이다.

 최인철 , 『프레임-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남들과의 비교는 행복감을 높이는데 전혀 생산적이지도 않고 지혜로운 일도 아니다. 내 삶의 법칙을 만드는데 과거 혹은 미래 자신과의 종적인 비교가 더 낫다는 것이다. 내 삶의 법칙, 모험 총량도 남들과의 횡적인 비교 속에서 정하는 것보다 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다. 


그렇다면 생산적이고 지혜로운 비교는 없을까? 저자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들과의 횡적인 비교보다는 과거 자신과의 비교 혹은 미래의 자신과의 종적인 비교가 하나의 대안이 된다.

과거의 자신보다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향상되어 가고 있는지, 자신이 꿈꾸고 있는 미래의 모습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상의 비교가, 남들과 비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결론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남들과의 비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는 것, 다른 사람들보다 물질적으로 더 잘 사는 것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보다는, '최선의 나'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최인철 , 『프레임-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모험의 이유


삶의 프레임에 대한 이야기 하면서 모험 총량의 법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심리학과 교수님 두 분- 최인철, 김경일 교수님-의 대중 강연을 보면, 최고의 행복감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여행'을 꼽는다. 

최인철 교수는 우리 경험의 이력서를 길게 쓰라고 강조한다. 우리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그 말은 모험 총량의 법칙에서 총량을 크게 설정하라는 말과 같다. 내 삶의 법칙을 행복의 수단으로 만들려면.


우리가 행복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시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관리가 사실 알고 보면 행복관리라는 거죠. 내 시간을 잘 분배해서 행복감을 별로 주지 않는 일들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행복감을 많이 주는 시간들에 그 시간을 늘리는 것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 일상을 잘 설계하는 것이 바로 행복한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조언해줄 수 있으실 텐데 딱 하나만 추천한다면 뭐가 있을까요?"
이 질문과 같겠죠.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활동들이 행복을 주는 정도가 다 다른데 가장 효과적인 게 뭘까요?" 
연구에서 나온 결과는, 단일 행동으로는 여행이 압도적으로 행복감을 많이 주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여행을 조금 더 자주 가십시오. 여행을 가는 것은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런 행복감을 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가장 기본적으로 벗어나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뭔가로부터 떨어져 보는 건 상당한 행복감을 줍니다. 그리고 행복감을 주는 활동에 대한 연구에서 행복감을 강하게 주는 활동으로 걷기, 놀기, 말하기, 먹기가 나오는데, 여행은 모두 해당됩니다. 일종의 행복의 종합 선물 세트, 행복의 뷔페라고 볼 수 있어요

최근 학자들이 돈과 행복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면 행복감이 늘어나느냐는 질문에서 돈을 어떻게 쓰면 행복에 유리하냐는 질문으로 질문의 방향을 조금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쓴 『소유냐 존재냐』아시죠. 소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되느냐, 존재라는 걸 경험하는 인간이 되느냐. 그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면 소유물을 사는 소비를 할 거냐는 질문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비하는 대상을 보면 소유물이 생기는 대상만이 아니라 뭔가를 체험하고 경험하기 위한 위한 소비도 있습니다.

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소유물을 샀을 때 경험하는 행복감은 강도도 약할 뿐 아니라 오래가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험을 위한 소비가 왜 행복감이 강하고 오래가는 이유가 뭘까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뭔가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할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이 사신 옷을 놓고 잠깐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몇 년째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몇 년 전에 다녀온 여행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야기합니다. 

어떤 여행은 인생을 바꿉니다. 어떤 옷은 인생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자동차는 우리 인생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 빈번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제가 돈의 문제인데요. 이 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라는 걸 해결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사실 어려운 문제죠. 그 한 가지 대안이 뭐냐 하면, 돈으로 경험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영어로 이력서를 레쥬메, CV(currivulum vitae)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력서를 관리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의 cv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경험의 이력서가 풍성합니다. 이런 걸 경험해 봤고 이런 걸 체험해봤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이력서가 너무 빈약합니다. 행복은 우리 경험의 cv와 비례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데 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때 우리에게 행복감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SBS CNBC - Who am I? - 행복에 관하여 : 몸 vs 마음」 중 편집,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


「SBS CNBC - Who am I? - 행복에 관하여 : 몸 vs 마음」,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의 강연에서는 메타인지가 활발히 활동하게 만들어주는 '낯선 상황으로 나를 집어넣는' 여행의 가치에 대해서 언급된다. 


목표를 가지기 시작하면 이제 나를 낯선 상황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기 시작하면 생각의 품질을 높이지 않고서는 이 상황이라든가 이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서 스스로에게 신호를 주게 되어있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목표, 소망을 가지셨다면 이제 남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나를 낯선 상황으로 보내는 일이죠. 그리고 우리는 나를 낯선 상황으로 보내는 일을 여행이라고 부릅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소망이라든가 목표를 만드셨을 겁니다. 연초이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이니까요. 그렇다면 이제 나를 낯선 상황으로, 평범한 상황이 아닌, 거기서 나를 벗어나게 해서 낯선 상황으로 나를 잠시라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의 메타인지가 스스로 나에게, 더 깊은 생각, 폭넓은 생각이라고 하는 선물을 주실 거라 믿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 능력보다 상황이다: 내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상황의 힘」,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세바시 637회 능력보다 상황이다: 내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상황의 힘」,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


이쯤 되면,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면, 당장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행과 모험을 통해 일상의 모든 낯섦을 오롯이 행복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모험 총량의 법칙'을 우리의 행복을 측정하고 계획하기 위한 프레임으로 제안한다.


내 모험의 흔적


나는 대단한 모험가였다. 

인천-오사카 비행기, 오사카-도쿄 자전거 

적어도 내 기억 속 첫 해외여행에서는. 일본 자전거 여행이었다. 처음 국제선을 타는 설렘만큼 두려움도 컸다. 발 딛는 땅 숨 쉬는 공기 모든 게 새로웠고 외국에서 외국사람과 대화한다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집에 있던 철티비 (싸구려 엠티비 자전거)를 수화물로 가져가서,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정돈된 자전거 길이 쭉 뻗은 일본의 1번 국도는, 태평양을 오른쪽에 두고 있다. 내 고물 자전거 파트라슈와 함께 태평양을 호령하던 그때를, 그 처음 순간들을 나는 대단한 모험의 역사로 평한다. 




일본 1번 국도 옆 쭉 뻗은 자전거 도로와 태평양

길마다 행복이 피어올랐다.

일본 인터넷카페

고작 열흘 남짓이었음에도 그날들은 추억의 화석처럼 각인되었다. 집에서부터 가져간 고물 자전거가 자주 삐그덕 거리고 열두 번이나 자전거 수리점에 들러야 했었지만, 돌아보니 그것마저도 좋았다. 아주 작은 캡슐호텔에 묵기도 했고, 고시원 방처럼 생긴 피시방에 묵기도 했다. 요즘 사토리 세대, 일본의 청년 낭인들 중 일부는 인터넷 카페에서 자고 생활한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들이 아주 불쌍해 보이지는 않는다. 의외로 지낼 만했던 일본 인터넷 카페가 떠올라서다. 저렴하면서도 깔끔했던 추억..

 

혼자 떠난 자전거 여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사카 도톤보리를 헤매고 있을 때 만났던 술 취한 일본 아저씨는 눈웃음과 함께 1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쥐어주셨다. 나도 이렇게 자전거 일주를 해보고 싶었다며, 조심히 다니라며. 얼마나 부러우셨으면. 지금 만약, 나도 술에 취한 거리에서, 싸구려 자전거에 깃발 달고 자전거 일주하는 청년을 마주쳤다면 용돈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후회할지라도. 

그땐 그 젊음이, 그 좋은 나이가 이렇게 사무치게까지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뒤 자전거 파트라슈는 이미 더 이상 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인은 기어 변경이 안 되었고 바퀴 스포크가 몇 개는 나갔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이사 다닐 때마다 챙겨서는 계단 구석진 곳에 방치해두었다. 굴러가질 않으니 훔쳐가는 좀도둑도 나타나지 않았다.  



치과에서는 가끔 진료실을 나서며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는 환자분들이 있다. 

아파서. 마음이 아파서. 보통 치아를 도저히 살릴 수가 없어 빼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졌을 때 그렇다. 타지 못하게 된 내 오래된 자전거를 끌고 동네 자전거 가게에 간 적이 있다.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새 자전거를 사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그때 자전거 파트라슈를 끌고 돌아오던 주말 한낮의 햇빛 아래. 잘 굴러가지도 않아 끌어야 하는 내 자전거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걸 보는 마음도 아팠다. 치아 뽑아야 한다는 소릴 들으면 이런 기분일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 담겨있는 물건이지만 전문가가 보면 더 이상 이 세상 속에 존재할 가치도, 쓸모도 없어 보이는구나. 살릴 수 있을까 싶어 혹시나 물어봤지만, 역시나 하고 돌아오는. 이제 어찌할 수 없다는 말. 

파트라슈와 함께 만난 후지산

마음이 아렸던 건 쓸모없다는 말 대신 조금의 공감을 바랐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 된다고, 이제 살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어쩜 그리 무심한지. 그 사실보다 위로받지 못하는 마음이 서글펐다. 내 자전거가 왜 이렇게 되었을지, 어쩜 그렇게 고생했을지, 그렇게 되기까지 그 시간 동안 이 친구와 나와의 처절한 생존, 사투의 경험과 그 속에서 일어났을 우리 둘의 화학작용, 그 추억들을 무시하는 말. 무심하게 자전거가 못쓰니 고칠 가치도 없다고 하는 말은 너무 속상하면서도 미운 말이었다.


그 후로 십 년 후, 비 그친 오후, 파트라슈와 함께 한강을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자전거 수리 기술의 발전 덕분에 다행히 많지 않은 수리비를 내고 자전거를 고칠 수 있었다. 내 자전거 파트라슈가 다시 돌아온 거다. 굴러가게 된 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 이 자전거와 함께 어떻게 그 긴 거리를 달렸었는지 모를 만큼 싸구려 자전거 다운 묵직함과 느릿함이 있었지만.. 이 자전거를 타면 마치 하코네 산맥에 있는 듯, 태평양을 내달리는 듯, 지난 좋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행복했던 그 기억의 신호를 불러오는 자전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어떤 값을 치러도 모자라지 않을 행복감이 밀려왔다. 

기억은 편집의 예술이다. 

추억도 편집되게 마련이다. 기억 조각들을 이리저리 가져다 붙여서 좋은 추억을 포장할 수 있다면 과거로 고통받는 기억 총량은 줄어들지 모른다. 인생 기억 총량이 있다면 행복한 기억을 늘려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절대적으로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는 건 인생 재산이다. 무조건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마음 총량의 법칙


모험의 총량을 결정하는 모험의 울타리는 다른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모험 총량의 법칙에 의하면 내가 모험가였다는 생각은 허탈감을 준다. 물론 총량이 크다고 믿는다면, 아직은 더 큰 모험이 남아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건 안정감을 주고, 지루한 삶의 동력이 된다. 


모든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모험은 다시 계속된다. 소박하게.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의 양도 한 없이 크다. 안정감 속에서 찾는 일상의 모험도 충분히 짜릿하다. 소박한 모험은 어디에나 있다. 조금 이른 출근길, 한 정거장 전 퇴근길에도 있다. 나는 다시 만난 파트라슈와 함께 태평양을 호령하지 않아도 좋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다리 근육의 조임과 풀림, 뛰는 심장, 바람 스치는 소리는 다르지 않았다. 더 작은 모험으로 더 행복하게 달렸다. 소소한 모험도 행복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지랄이 마음의 이끌림이듯, 모험도 마음이 정하는 거다. 

결국은 행복을 만드는 총량 법칙은 내 마음을 어디에 쓰는가 하는 문제, 또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니 항상 물어야 한다. 일생에 쓸 수 있는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나는 내 마음에 얼마나 간절한지, 내 마음 잘 쓰고 있는지..

 

일생에 쓸 수 있는 마음 총량의 법칙!

일생에 쓸 수 있는 마음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마음의 울타리가 얼마나 넓은가 보다, 그 안에 채워지는 마음이 어떤 건가가 더 중요할 거다. 어떤 모험 중에도 잠시 멈춰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마음 어디에 쓰고 있는지, 내 마음 잘 쓰고 있는지.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19 내 행복의 법칙, 마음 총량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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