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공간에 살기
상실 혹은 감사의 풍경
하염없이 인도를, 그리고 하염없이 함피를 여행할 때였습니다. 남인도의 함피는 융성한 제국의 영광이 있었던, 지금은 폐허로 남은 작은 도시입니다.
다른 인도 도시에서 많은 장사꾼과 사기꾼들에 지쳐갈 때쯤 그곳에서 만난 인디언 친구는 깊은 눈을 가진, 보석 같은 영혼의 착한 친구였습니다. 인도 워크캠프 (국제 봉사활동 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담당하던 인도의 건실한 청년이었으니까요.
그와 잃어버린 제국의 흔적들 사이로 오토바이를 타고 둘러보다가 너무 크고 넓은 제국의 향기에 그만 지쳐버린 우리. 항상 에너지가 넘치던 친구는 멈춰 쉬어가며 사진이나 찍자 합니다. 그는 어떤 공간이라도 행복한 놀이터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흔한 유적, 이름 모를 폐허에서 점프 샷을 찍으며 놀다가 그만 오래된 돌덩이 사이로 떨어져 버린 핸드폰. 액정은 조각이 나버렸고 언제 또 건드리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상황.. 여러 상념이 몰아쳤습니다. 아직 여행 한참 남았는데.. 인도는 IT강국이니까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바꿔치기 사기도 많을 텐데 어쩌지..
내 잘못으로 내 것이 부서져버렸으니 누구를 탓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나 만약, 인도 친구의 실수로 그것이 망가졌더라도 그의 탓을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망가진 핸드폰을 두고 남 탓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시간 폐허 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현대 문명의 상징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를 공유하는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전혀 방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쏟아낼 여유를 아껴 남은 여행에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여행이 이어져 그 한 달쯤 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삐죽삐죽한 모양을 수없이 마주쳤습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상징하는 가리비 문양. 문득 깨진 핸드폰을 보다가 한 점에서 깨지기 시작해 여러 방향으로 갈라진 그 모양이 꼭 그 가리미 문양이라, 이런 게 운명인가 싶었습니다. 액정 깨져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사거리가 떠올라 적었습니다.
1. 여행하며 괜히 핸드폰 보며 시간 때우지 않게 되어서
2. 인디언 친구와의 추억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해줘서
3. 내가 가진 소박한 물건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어서
4. 남 탓 할 일 없이 내 실수 때문이어서
5. 지금 이 길 위에 서있는 것이 운명인 것만 같아서.
무소유의 행복이란
여행에서 돌아와 한참 시간이 흘러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또 액정이 깨져버린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인데, 만약 그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는 괜히 미안해하고 나는 괜히 남 탓할 수도 있었을 테니, 지금, 내 탓이라 또 다행이라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멍하니 까만 창 밖을 보다가, 지난 상념이 휘몰아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운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함피도, 순례길도. 깨진 액정이 추억을 불러오게 될 줄이야. 문득 너무 그리워지던 그 길. 감동과 눈물과 이야기와 모든 게 있던 그 길. 기차 안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그 길에 서있는 꿈.
그리고 마침 무심코 보던 TV 드라마 속 대사. 남주인공이 무언가를 허둥지둥 찾는 여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왜 때문에 그래요?”
다급한 목소리로 여주인공이 말합니다.
“땡땡 씨가 준 프러포즈 반지를 잃어버렸어요. 어떡하죠? 어흑흑”
이제 하이라이트. 그녀의 미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남자의 나지막하지만 진심 어린 목소리. 진짜 멋있습니다.
“걱정 말아요. 비슷한 거 또 사면되죠.”
“아니에요, 그래도 그건...”
“그게 뭐가 중요해요. 땡땡 씨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겠어요.”
오글오글한 드라마 대사지만 이 장면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더 중요한 게 뭔지, 정말 많이 놓치고 살지 않는가요.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법정, 「무소유」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는 필요한 것까지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집착하지 않고, 얽히지 말고. 정말 소중한 걸 챙기기.
"당신 인생의 단 한 번의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여러 해 동안 나는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의 힘과 즐거움을 옹호해왔다. 10년 동안 빼놓지 않고 감사 일기를 썼고, 내가 아는 모든 이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권유했다. 그런데 너무 바빠지면서 나는 몰려오는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전히 일기장을 펼치는 날도 있었지만 매일 다섯 개씩 감사했던 일을 적던 습관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1996년 10월 12일의 감사 일기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1. 나를 시원하게 감싸주는 부드러운 바람을 받으며 플로리다의 피셔 섬 주위를 달린 것
2. 햇빛을 받으며 벤치에 앉아 차가운 멜론을 먹은 것
3. 머리가 엄청나게 큰 남자를 소개팅 받은 게일과 신이 나서 오랫동안 수다를 떤 것
4. 콘에 담긴 셔벗. 너무나 달콤해서 손가락까지 핥아먹음
5. 마야 안젤루가 새로 쓴 시를 전화로 들려주신 것.
나는 감사함의 공간에 살며 그로 인해 적어도 백만 번은 보답을 받았다. 소소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고, 더 많이 감사할수록 내가 받는 은혜 또한 풍부해졌다. 그 이유는 우리가 관심을 보내면 그 관심의 대상은 더 크고 넓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삶에서 좋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더 많은 좋은 것들이 딸려 나온다. 나는 확신한다.
오프라 윈프리,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오프라 윈프리도 '감사함의 공간'에 살았다고 합니다. 감사의 공간은 남인도의 이름 모를 폐허이거나 고된 순례길일 수도,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순간이나 어떤 상실의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매일 감사일기를 쓰면 감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매일 생각해보면 적어도 다섯 가지는 있습니다. 감사할 일들을 사소할 지라도 적다 보면 다섯 줄이 모자랄 때도 있고요. 오늘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일, 깨달음을 준 일, 부드러운 바람 사이 햇살, 지나가는 사람의 맑은 표정,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 속에도 항상 감사는 숨어있습니다. 어떤 날은 아주 오랜만에 생각난 친구와 연락이 닿기도 하고, 그저 옆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순간도 있고, 추억에 잠긴 어떤 날은 그 추억에 감사하게 되기도 하죠.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 곁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도 전염이 됩니다. 크고 넓어지는 감사의 공간에서 전염되는 감사의 힘. 그게 적어도 하루에 다섯 가지는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공간에 숨 쉬는 순간의 행복도 믿습니다.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18 감사를 기록하고, 감사의 공간에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