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스펙
크레덴시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까미노 여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크레덴시알'을 만드는 일입니다. 순례자 사무소를 찾아가면 받을 수 있는데, 이 사무소는 처음으로 까미노의 인사말 '부엔 까미노(Buen Camnio)'인사를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길에 들어섰으니, 당신은 이미 Pilgrim, 순례자라고 말해주는 듯이.
마치 여행 다닐 때 그 나라 도장을 찍는 것처럼,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에 머물 때마다 그 마을, 그 알베르게 저마다 특징적인 도장을 찍을 수 있고, 그래서 한 달이 넘는 까미노 프랑스길 800km를 완주한 사람들은 크레덴시알에 도장들이 빼곡히 쌓이게 됩니다. 여정이 끝나갈 즈음, 그 도장 가득한 크레덴시알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햇빛에 탄 얼굴 사이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 보입니다.
ⓒPilgrim's Welcom Office (Official) (Left), ⓒJuno (Right)
별들의 벌판이라는 뜻을 가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순례자들이 꿈에 그리는 그 도시의 순례길 마지막 사무소에 가면, 완주증을 발급해줍니다. 100km 이상 걸어온 순례자들에게 발급되는 완주증을, 순례자들은 구겨질까 봐 보호 상자를 구입하기도 하고, 마치 그 증서에 모든 추억과 노고가 다 담긴 것처럼 애지중지합니다.
한해 20만 명(2014년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소에서 받은 순례자 수 237,886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받는 크레덴시알과 순례길 완주 증명서. 정말 소중한 물건이지만 이거 어디 쓸까요? 인생의 상장처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두고두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서랍 속에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증명서보다도 소중한 건 그때 일기와 사진을 간직하고 가끔 꺼내어보는 일, 그 길에서 만난 이들과 연락을 하는 일. 그렇게 종종 행복하고 아련한 상념에 젖게 만드는 그 기억이 아닐까 합니다.
증명이 필요한가
일본인들의 영산(靈山) 후지산은 3776m의 고산입니다. 보통 후지산 등정은 2천 미터가 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게 되고 날카로운 바위가 가득하다거나 험하지는 않지만, 절대 만만한 산행은 아닙니다. 고산이기도 하고,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이 웬만한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정상에 이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 분화구 위에 서서, 받을 수 있는 기록장이라고는 너무 넓어서 화면에 다 잘 들어오지도 않는 풍경사진뿐입니다.
정상의 산장에서 하나 받을 수 있는 게 있다면 흔한 기념품들과 도장이 있습니다. 일본의 명산인 만큼 일본인들이 더 많아 여권에 찍기에 좋은 그 도장마저 관심 없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보다, 한참 아래 있다가 때로는 몰려들어와 몽환적인 풍경을 만드는 구름의 촉감, 금방이라도 터지지 않을까 상상해보게 되는 후지산 분화구의 위엄,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다는 성취감. 이것 말고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히말라야 산군에 가려거든 네팔 정부의 허가증이 필요합니다. TIMS라고 부르는, 트레커 정보 관리 시스템인데 이게 일종의 기념품이 됩니다. 안나푸르나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도 누가 도장 찍어주지도 않을 겁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는, 내가 무얼 이루어왔든, 어떻게 힘들게 이곳에 왔든 다 내려놓고 멍하니 바라보게 됩니다. 겸손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은 풍경 앞에서는.
여행을 하다가 여권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단수여권을 재발급받게 되고 정신이 든 뒤에, 아쉬웠던 건 후지산 도장뿐만 아니라 여행 다니며 촘촘히 쌓여왔던 출입국 도장과 비자들이었습니다. 그 여권 안에 소중한 여행 추억들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 아쉬움이 전혀 길지 않았습니다. 그게 없다고 해서 후지산의 구름과 히말라야의 설산도 기억에서 사라질리 없으니까.
평생 스펙
마라톤을 완주하면 받을 수 있는 메달들도 그 시간의 피땀이 들어있는 소중한 금속 덩어리입니다. 처음 풀코스를 뛰고 받은 완주 메달이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네 시간 넘는 동안 옷 거친 부분이 가슴에 계속 쓸려 피가 묻은 옷과 목에 걸었던 42.195km 메달의 감촉 만큼은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63계단 오르기 대회'라는 특이한 대회가 있습니다. 63 빌딩 1,251계단을 오르고, 참가비는 기부가 되는 기부 프로젝트의 일환. 이 대회에서도 마라톤처럼 기록증을 줍니다. 이 기록증을 받아 들면 그렇게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다고 해도 뿌듯하긴 합니다.
기록증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기록하지 않은 시간들에 대한 증명서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면 눈물 흘린 횟수, 공부한 시간, 사랑한 날들.. 그런 시간을 기록해두고 기억하는 건 마라톤 기록보다, 또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각종 점수와 증명서들, 스펙라고 쌓아왔던 것들보다 더 가치있을지 모르니까. 어디 쓸 데는 없지만 누구보다 소중한 내 인생 이야기니까.
깊은 사춘기 시절을 겪는 중2가 할 법한 말. '점수 따위가 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중2 때 세상의 모든 진실을 다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종이로, 금속 덩어리로, 사진으로, 때로는 도장 같은 증명서조차 없더라도 가슴 깊숙한 곳으로 받은 길 위의 자격증은 내 인생의 스펙을 만들어 줍니다. 추억과 깨달음 속에서 내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고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평생 스펙!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17 내 인생의 스펙, 길 위의 자격증 만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