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미루지 말자
공원에서 책 읽는 상상
멋진 도시 한복판 햇살이 부서지는 공원에서 한가로이 책 읽는 여유를 부리는 상상. 에메랄드 해변이 있는 섬 나라 예쁜 리조트에서 즐기는 망중한.
누군가에게 '여유'의 이미지란, 이렇게 언젠가 '시간이 나면'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행 가면 보통은, 가야 할 데가 너무 많아서 그런 여유는 없습니다. 카페에서 책 읽는 시간도 내 볼 수는 있는데, 보통은 시간에 쫓기게 되죠. 계획은 너무 많고, 마음은 분주해지고요. 몇 주씩 여행 가면 가능할 텐데, '몇 주씩 여행' 어디 그게 한국 말인가요.
그런데 실은 그런 여유를 '꿈'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지 모릅니다. 제가 여행에서 깨달았던 두 가지 기만은 하나는 여행지에서는 무얼 해도 무조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착각, 다른 하나는 평소에 하지도 않으면서 - 예를 들면 책 읽기 - 시간 나면 할 거라고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이었습니다. 이런 착각 때문에 어쩌면 일상에서도 가능한 그런 여유를 밑도 끝도 없이 상상하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사실은 어떤 '행위'가 나에게 주는 기쁨을 과소평가하면서.
모스크바는 공원의 도시라 할 만큼 큼지막한 공원들이 널려있습니다. 도심 한복판 가장 크고 시끌벅적한 쉼터, 고리키 공원에는 오늘도 모스크비치, 여행자 할 것 없이 여유를 즐기고 있을 겁니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 어쩌면 그들도 쉬어갔을지 모르는 나무 아래 한가로운 여유.
막심 고리키와는 별로 관련이 없지만 고리키라는 이름만으로, 품격이 느껴지는 공원. 도심 속 커다란 공원에 붙은 이름에 문학가의 이름이라니, 러시아 인들은 알면 알 수록 낭만적인 사람들입니다. 생각보다 여성 비율도 훨씬 높고요. 해가 길어지는 여름이면 모스크바는 정말 말 그대로 눈부신 도시가 됩니다.
지나간 여름, 모스크바 고리키 공원에서 광고 촬영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어쩌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광고 촬영 경험에서 느낀 건, 한 컷을 찍기 위한 대기 시간이 길다는 것과 방송일이란 듣던 것보다 더 몸이 고된 일이라는 것. 정말 보는 것과 실제로는 다르고,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결국 광고에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공원에서 책 읽는 모습 연출을 위해 감독님이 준비해주신 러시아 책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당시 읽고 있던 파울로 코엘료의 『불륜』을 꺼내들었습니다. 러시아 소설들은 몇 편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보통은 너무 긴 주인공 이름 외우느라 몰입이 어려워서.. 어쨌든 연출이지만 이때라도 느껴볼 수 있었던 여유였습니다. 오히려 자유여행할 때는 만끽하지 못했던 '내가 행복한' 순간. 그걸 만들어주어야, 멍석 깔아주어서야 느낄 수 있었던 아이러니함.
모두 다 끔찍해. 날 좀 내버려둬.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고 가슴도 아프지 않아. 남은 것은 불면과 공허와 무감각뿐이야. 너희도 같은 기분이지. 스스로에게 물어봐... 하지만 그들은 잠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뿐이라고, 잠시 우울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혹독한 그 말, 외로움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행복을 가져다줄 유일한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빛나는 갑옷을 입고 나타나 용을 무찌르고, 장미를 꺾어 가시를 잘라줄 기사를.
파울로 코엘료,『불륜』
에펠탑보다 미테랑
책 보는 게 행복인 평범한(?) 저에게는 혼자 떠났던 파리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꼽으라면, 미테랑 도서관 방문이라고 합니다. 파리에 가니 혼자 좋은 것들을 보기는 왠지 너무 아까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와야겠다며 남들 다 가는 데는 좀 아껴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바로, 도서관 가는 일! 파리에 오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유학이라는 로망이 남아있던 저에게는 너무 환상적인 일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후배의 추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관광지로는 조금 심심한 곳이긴 합니다.
파리 시내에는 미테랑 도서관보다 먼저 생긴 퐁피두 도서관도 있는데, 두 도서관 모두 대통령 이름을 딴 것이 특이합니다. 이 나라는 국제 공항 이름도 '샤를 드골' 전 대통령 이름이니까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좌파 사회당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의 도서관은 유료 도서관이고, 우파 대통령이었던 퐁피두의 도서관은 무료로 개방되어있다는 사실. 대통령이 도서관을 만드는 나라, 우리나라는? 휴..
자존심 상하는 건 이뿐만 아닙니다. 국사책에서 배웠던 현존하는 것 중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이 문화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인 리슐리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미테랑 도서관보다 더 좋은 위치, 파리 한복판에 있는 도서관에. 프랑스는 알고 보면 문화재 약탈 전문 국가지만 직접 구입해 수집한 문화재도 많은데, 우리 직지심경도 그중 하나라서 반환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루브르에 가서 모나리자를 보는 '세계적인 여행'만큼이나 리슐리외 도서관에서 직지심체요절을 열람하는 것도 의미 있는 '한국적인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직지 홍보단의 직지심체요절 이야기
미테랑 도서관은 가는 길에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루브르 베르사유 몽생미셸에만 가는 관광객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 세느강변에 자리한 미테랑 도서관을, 건너편의 베르시 공원과 연결하는, 세느강의 37번째 다리 이름은 '보부아르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계약결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성공作은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결혼 관계이지만 누구든지 다른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계약을 맺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스인이 사랑하는 이 문인의 어떤 문학적 철학적 성취보다 그녀 자신이 성공이라 부르는 것이 던지는 메시지가 더 진실되게(?) 느껴집니다.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계약결혼은, 우리 시대 결혼에 대해 좀 더 색다른 옵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대안, 앞서 나간 아이디어로.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여성의 창조적인 본성을 억누르고 오직 집안일과 육아에 전념하는 가사노동자로 전락하게 한다고 믿고 있던 보부아르로서는 이런 사르트르의 제안이야말로 여성을 완성된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이상적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49년에 발표한 명저 ‘제2의 성(性)’에서 “부부가 단지 서로의 성적인 만족을 위해 평생 동안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상대방을 구속하는 것은 정말 부조리한 것”이라며 전통적인 결혼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내 생애 최고의 성공작은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 한국경제, 2012.11
미테랑 도서관은 비교적 최근, 1995년에 연구자료실 중심으로 개관하였습니다. 네 권의 책 모양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도서관. 1일 이용료는 3.5 유로, 1년 이용료는 38유로. 이른 아침부터 연간 이용료를 내고 다니고 있을 사람들이 줄 서서 입장합니다. 전시실도 있어 가족 놀이터와 문화공간이 되기도 하고, 연구원의 학술 연구하기에도 좋고, 학생들에게는 공부하고 싶은 독서실이 되고.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콧등이 시큰해졌던 건 퀴퀴한 느낌 조명 아래 구닥다리 책상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던 내 학창시절이 억울해서였을까요.
정기간행물 36만 종을 제외한 도서자료만 1,400만 책을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직원 수도 약 2,700명에 달한다. 미테랑 도서관 건물은 지상 18층, 지하 7층의 총 25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고탑 4개와 2개의 열람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고는 하중 등을 고려하여 2,000만 책(점)의 자료를 지상의 탑에 분산 배치하고 있다. 서고탑의 명칭은 시간, 법, 숫자, 문자의 4가지로 명명하여, 각각의 탑에 해당 분야의 자료실을 설치하였다. 즉, 시간의 탑에는 철학· 종교· 역사· 지리 등 인문과학 관련 자료실, 법의 탑에는 정치학· 경제학· 법학· 정부간행물 관련 자료실, 숫자의 탑에 과학· 기술 관련 자료실, 문자의 탑에 문학· 언어· 예술 관련 자료실을 두고 있으며 모든 자료실은 내부에서 연결되어 있다. 이 주제별 자료실은 정원을 기준으로 크게 일반자료실과 연구자료실로 나뉜다. 정원보다 위에 있는 일반자료실은 정원 상층(Haut-de-jardin) 도서관이라고도 불리며 16세 이상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정원과 같은 층에 있어 정원층(Rez-de-jardin) 도서관이라고도 불리는 연구자료실은 18세 이상 이용허락을 받은 연구자만 출입할 수 있다.
조재순, '도서관을 찾아 떠나다- 통합과 분담, 연구자 중심 서비스를 보다', 국립중앙도서관, 2013
미테랑 도서관에 갔던 날, 분야별 독서실 중에서 자리가 남아있던 건축 관련 서가에서 오후 내내 앉아 있었습니다. 여행 중이었지만, 여행기를 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맞은 편자리에서는 건축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작업도 하고, 책을 잔뜩 쌓아놓고 공부도 하고.
나도 마치 거기 숨 쉬는 열정의 일부가 된 것 같은, 파리에 약동하는 젊음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느낌. 파리지엥에게는 식상하고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를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이 저에게는 두고두고 꺼내고 싶은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해도 되는 일들
여행을 하면서 발견한 '내가 행복한 장면'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두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장면입니다.
꼭 여행에서 뭘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는 행동' 그래서 두 번째 책 자기소개에는 '굳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두고 책 읽는 소박한 허세'를 즐긴다고 썼습니다. 긴 여행들 사이에 그게 제게 행복을 주는 행동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온 덕분입니다. 언젠가 느낌 있는 북카페를 만드는 꿈도 생겼고요.
요즘 젊은 이들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른다는 건, 여행에서 하고 싶은 일도 모르는 것과 연결되어 있고 그건 결국 내가 언제 행복한지 잘 모른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하지 않는다는 건 내 삶에 대한 너무 한 기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를 하루 못 씻기고 재웠다고 해서 큰일 나지 않는다. 일이 많으면 시부모님 밥상을 못 차려 드릴 수도 있는 법이다. 남편에게 아이를 봐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도 된다. 그렇게 하고 얻은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 밀린 수다를 떨어도 좋을 일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시간이 정말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즐겨라.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모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김혜남,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지금 여기서도 할 수 있다면, 해야 하는 일들을 조금 미뤄두고 그 일들에게 시간을 좀 더 양해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알고 보면 짧은 인생, 짧은 하루에, 말로만 하지 말고, 더 미뤄두지 말고.
여행의 기술로 만드는 행복한 일상 #16 지금 행복한 일 미루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