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후와타네호의 거북이
회진을 온 교수님은 CT상 비장과 간이 비대해져 있고 복수가 차있는 거 보니 ‘간정맥폐쇄증’이 맞지만 아직 간수치가 정상 범위 안에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매일 배는 계속 불러오고 몸무게도 늘어난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 몸무게와 배둘레를 재는 게 무섭다. 너무 울어 눈 주위가 다 짓무르고 6주 가까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아직도 구역질을 한다. 혈소판은 아직도 바닥이라 매일 혈소판 수혈을 받지만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혈소판이 낮으니 온몸에 점상출혈이 일어나 내 팔을 보는 게 징그러워 이불로 몸을 감추고 있다. 소변이 나오지 않아 이뇨제를 맞지만 소변은 잘 나오지 않는다.
늘 웃던 내가 계속 울기만 하니 간호사 선생님들이 걱정을 많이 해주셨다. 간정맥폐쇄증 치료제가 있으니 울지 말라고 해주시며 위로를 해주셨지만 마음이 너무 지친 탓인지 계속 눈물이 나고 마음에 힘이 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돼. 힘내야지. 거의 다 와서 이렇게 멘털이 무너지면 안 돼’라고 계속 나를 다그치다가 그냥 다 내려놓기로 했다.
일부러 힘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간과 신장이 힘을 내주면 좋겠지만 만약 힘을 내주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스마일 항암’은 특히나 간과 신장에 무리를 주는 독성항암이었다. 그래서 해독제를 계속 맞았고 간 수치를 낮춰주는 약도 계속 먹으며 치료를 받았다. 퍼붓는 약이 힘들었을 텐데 너무 잘 버텨줘서 덕분에 6차까지 항암을 마치고 이식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 버텨준 간과 신장이 10배를 퍼붓는 이식 전 항암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던 나는 내 마음 하고는 참 많은 대화를 했었다. 마음이 슬프진 않은지 우울하진 않은지 잘 살피며 심리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상담도 받았다. 하지만 내 몸하고는 대화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는 것, 피가 나면 멈추는 것들 등의 과정들이 내 몸속 장기들이 열심히 일해주는 거란 걸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프고 나서 내 몸속 세포들이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우리가 힘을 내야 해! “라고 말하며 열심히 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고, 장기들이 서로 “그만해. 우리가 이러면 한솔이가 더 아파”라고 말하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한 번도 자상하게 들여다보지도 않은 못된 주인을 살리겠다고 내 몸의 세포들과 장기들이 얼마나 열심히 달려주었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러기에 이렇게 지쳐버린 내 간과 신장에게 더 힘을 내달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동안 고생했다고 쉬라고, 너희들이 결국 힘을 못 내도 이해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몸무게가 더 이상 늘지 않았다. 배둘레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혈소판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날들이 지속되었고 교수님은 ‘간정맥폐쇄증’이 약 안 쓰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며 내가 그런 경우가 될 수 있다고 하시며 퇴원을 해서 외래로 지켜보자고 해주셨다.
퇴원이라니...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교수님의 말에 너무 기뻤다. 퇴원을 하려면 가슴에 있는 히크만을 빼야 해서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시술방으로 갔다. 내 앞의 환자가 시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선생님이 아프지 않냐고 하자 그 환자분이 “아니요. 너무 개운해요. 이 날을 기다렸어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마취주사를 맞는데 너무 아파서 비명이 나왔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3월 말부터 늘 내 몸속에는 종류는 다르지만 중심정맥관들이 있었는데 드디어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시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오니 이식 코디선생님과 영양사 선생님이 오셔서 이식 후 생활관리에 대해서 안내해 주셨다. 내 면역 상태는 신생아와 같아서 특히나 면역력이 낮은 100일 동안은 외식과 배달은 금지이고 모두 요리를 해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생야채와 날 것, 껍질 없는 과일은 금지이고 집에서 요리를 한 후 2시간 안에 먹어야 했다. 혈소판이 낮아 요리를 하다 다치면 피가 멈추지 않고, 재료에 의한 감염이 있을 수 있어 요리를 내가 직접 하는 건 금지이다. 먼지로 인해 폐렴이 올 수 있어 내가 청소하는 것도 금지이다. 강아지와 어린이집을 다니는 조카가 있는 집에 가는 것도 안돼 병원 근처에 단기 오피스텔을 구해야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면역력이 오르고 수치들이 괜찮아지면 신생아 때 했던 예방접종들도 다시 해야만 한다니 우리 엄마는 나를 두 번 키우는 셈이다.
이식 후 생활관리 교육까지 받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제발 오늘 밤 열이 나지 않고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고 내일 피수치가 나쁘지 않아 퇴원이 취소되지 않길 바라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간호사 선생님들이 인사를 하러 와주셨다. 그동안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눈물 짓는 분들도 있었고, 우리 서로 보고 싶어도 이제 절대로 보지 말자고 해주시는 분도 있었다. 나와 엄마도 그동안 너무 감사했다고 덕분에 잘 치료받았다고 말하며 함께 울었다.
병원 밖을 나서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을 스쳤다. 추웠다. 그리고 이 추위를 느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작년 여름이 더웠다고 했는데 난 늘 병원 안에 있었기에 땀을 흘리지 않았다. 장마가 길었다고 했는데 난 우산을 펼쳐 본 적도 없었다. 더우면 땀 흘리고 불평하고,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혀서 비를 맞으며 불평하고, 아무리 껴입어도 춥다고 불평하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이젠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이 차가운 바람이 참 좋았다.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방학에 멕시코의 ‘지후와타네호’에 간 적이 있었다. 거북이알이 정력에 좋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거북이알을 불법으로 가져가 파는 바람에 거북이가 멸종위기에 처해 거북이알을 지키는 봉사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이 봉사활동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멕시코가 너무 멀어서 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기에 뉴욕에 있을 때 신청해서 가게 되었다.
까만 밤, 별이 쏟아지는 바다를 걸어 알을 낳는 거북이를 찾았다. 거북이가 땅을 파고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면 그 땅을 다시 파 알들을 데려가 봉사센터 근처의 땅에 다시 묻었다. 시간이 지나 알을 깨고 손바닥보다 작은 아기거북이들이 태어났다. 그러면 그 거북이들을 다시 바다에 보내주는 것까지가 봉사자의 일이었다. 너무 작은 거북이에 비해 바다의 파도는 높고 거칠었다. 걱정이 된 나는 장기봉사자에게 아기거북이가 저 파도를 이길 수 있냐고 물었고 그 봉사자는 많은 아기 거북이들이 죽는다고 대답했다. 그냥 아기 거북이들이 클 때까지 센터에서 키우면 안 되냐고 하니 그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거북이의 생존을 위해 좋지 않다고 마음이 아프지만 저 거친 바다로 보내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태양이 오르는 이른 아침, 나는 작은 거북이들이 자기 몸짓보다 몇 십배는 큰 파도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들이 부디 저 파도에 지지 않기를... 그래서 어른이 된 거북이들이 다시 이 바다에 돌아와 새끼를 낳기를 바라며 그들을 지켜보는데 세상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 있는 아기거북이들이 너무 기특해 매번 눈물이 났다.
아직 내 치료는 끝나지 않았다. 내 피수치는 아직 일반 사람들에 비하면 현저히 낮아 외래로 가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근육이 다 빠지고 체력이 바닥이라 잘 걷지도 못해 일상생활을 하는데 무리가 있다. 몸무게와 배둘레가 다시 늘지 않는지도 계속 지켜봐야만 한다. PET-CT도 찍어보고 결과를 봐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다시 세상을 향해 작은 발자국으로 걸어보려고 한다. 지후와타네호의 거북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