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야? F야? MBTI는 여전히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측정하는 중요한 도구다.
발생학적 관점에서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나'와, '너'라는 존재를 결정짓고 구분하기도 했다. 참으로 비과학적이고 우연에 기댄 미신이지만 '바넘효과'에 가까운 대중심리의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사람을 4개의 혈액형 또는 12개의 별자리로 구분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 16개의 유형으로 구분하고 심지어는 규정지어 버리는 MBTI는 좀 더 과학적인 포장을 하고 대중들에게 깊이 스며들었다. '맞아, 난 'I'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의 용량은 얼마쯤일까? 분명한 것은 '망각'이라는 현상으로 그 한계는 매번 요동을 친다는 점이다. 기억이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곧 그 사람 자체를 규정한다. 다른 반론이 있을까? 기억의 양을 늘리는 방법은 공학적으로 더 많이 주입하면 된다. 하지만 수용자가 의식이 없거나 목적(동기)이 없다면 주입이 되지 않을 것일 테다. 때문에 특히 교육의 영역에서는 능동적 기억의 형성을 더욱더 강조한다. 그럼 능동적 기억을 만들어 내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을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작동한다면 우등생이란 타이틀은 아마 따놓은 당상일 거다. 그래서 직접적 경험을 강조한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더 나아가 백견이불여일행'이라고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건은 그 윤곽이 더 선명하고 수명도 길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억이 만든 '나'라는 존재는 생물학적인 인자를 넘어선다. 나는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은 철저하게 사회라는 집단에 종속되어 있다. 사회를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조상이 물려주신 내 몸속을 흘러 다니는 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세포 속의 DNA도 물론 '나' 그 자체다. 하지만 100년을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결정'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비극에 가깝다. 캐캐묵은 본성과 양육의 담론으로 빨려 들어갈 생각은 없다. 분명히 유전인자는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과학적 사실이거니와 우생학적으로 인간들을 선별하는 비문명적 사고 또한 강물의 자정작용처럼 사그라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생물학적인 나는 이렇게 태어났지만 주변의 환경과 나의 의지에 따라 삶의 색깔은 제각각으로 채워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더더욱 혈액형과 별자리, MBTI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채로운 기억들로 만들어진 인간, 그 가운데서도 나(self)라는 존재를 각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대뇌피질에 저장된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오늘도 지금도 현재도 감각되고 지각되고 인지되고 인식되는 수많은 기억들. 그것이 곧 나다. 자연과 사회라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수많은 외부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여 나름의 표상으로 마음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예술가에 가깝다. 원하는 내가 되고 싶다면 원하는 기억을 만들면 된다. 그것이 곧 나의 정체성이다. 아이스브레이킹과 흥미로운 사교술로 MBTI와 혈액형은 매력적이지만 측정의 도구로서 사용한다면 그건 객관적 지표가 될 수 없는 엉터리를 맹신하는 것이다. 나라는 한 사람, 너라는 또 하나의 존재. 그리고 서로라는 관계 맺음은 어쩌면 기억과 기억의 공명이 만들어내는 지각의 장(場)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