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 시리즈를 진행하고 싶었는데 해본다.
나는 극 I 성향이다. 그리고 기자 13년차다.
기자는 E 성향이 여러가지로 이롭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기자가 적성에 안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3년을 해왔으니...남모를 마음 고생도 많이 했다.
극 I가 겪은 13년간의 기자 생활을 하나 둘 씩 털어놓으려 이 시리즈를 시작한다.
기자 초년병때 일이다. 1년차, 아니면 2년차 때다.
당시 내가 있던 신문사에서 무슨 특집 기사를 썼어야 했다. 뭔 기념 때문이었는데....(신문사는 창립기념, 새해, 연말 이럴 때 되면 휴일은 커녕 더 바쁘다. 특집호 만들어야 해서...) 그때 의미있는 인터뷰를 해야 했고, 나는 북한산 산악 구조대를 인터뷰 해야 했다.
인터뷰 장소는 당연히 북한산. 산악구조대의 기지는 산 중턱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등산.
북한산 초입에서 사진 선배를 만나고, 인터뷰를 해야 하는 구조단장님을 만났다. 함께 등산을 해야 하는 상황.
시간을 많이 뺏기가 죄송해 서둘러 따라 올라가려 했지만 등산은 영 힘들었다.
하지만 그 때 그 단장님.
"급할 거 하나도 없어요. 천천히 오세요."
라고 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기지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입대를 그 곳으로 한 군인 신분의 구조단원 5~6명이 있었다. 여자는 나 혼자였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취급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때 내 나이 25~26세였지만 그들은 더 어렸다.
인터뷰를 할 때는 극 I고 나발이고 다 집어 쳐야 한다.
질문을 주도해가며 상대방의 말에 경청해야 하고 기사거리가 될 만한 걸 뽑아내야 한다.
단장님과 약 1시간 동안 집중해서 인터뷰를 했다.
단장님은 생명의 소중함을 여러 번 강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제발 운동화 신고 등산하지 말라고 했나...
머리가 깨져 마치 잼...처럼 피가 흩뿌려진 현장도 많이 봤다고 했다. 나보다 더 어린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담담한 그들의 표정이 가끔 생각난다. 나는 듣는 것만해도 괴로웠는데, 직업인이란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허기가졌다. 놀랍게도 단장님은 나와 사진 선배의 라면까지 끓여주셨고 다같이 둘러앉아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영 어색했지만.. 정말 꿀맛이었다. 그리고 잠시 쉬는데 뒤에서 단장님이 아직 멀쩡한 칫솔을 버렸다고 단원을 혼내는 걸 듣게 됐다. ㅋㅋㅋㅋ인터뷰 중 이런 말도 있었다. 여기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손웅정 감독 같기도 하고...그런 스타일이었다. 매우 엄한 듯 했다.
며칠 후 그들의 인터뷰는 밝게 웃는 사진과 함께 우리 신문 1면에 실렸다. 사실 인터뷰는 사진이 더 중요하다 ㅎㅎ 그럴 수밖에 없겠지.
신문이 나간 후 단장님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기자님. 아이들 사진이 너무 잘 나왔습니다. 몇 부 더 구할 수 없을까요?"
나는 신문을 충분히 준비해서 손수 카드를 써 같이 보내드렸다. 카드에 뭐라고 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그렇게 종종 신문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카드를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단장님에게 다시 답장이 와 있었다.
"기자님. 아이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얼굴만큼이나 글씨체도 예쁘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난 얼굴도 평범하고 글씨는 악필이다. 하지만 진심이 느껴져 내가 다 감사한 순간이었다.
극 I 이지만, 나는 좋은 사람에게는 정말 잘 한다.
그 단장님과 인연을 이어오지 못한 게 아쉽다.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라 지금은 은퇴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인터뷰이들과 정기적으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왔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나와의 인연은 끊기더라도 인터뷰했던 그들이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면 난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