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back
파친코 시즌1이 끝났다. 퇴근하고 이곳 제철음식이자 보양식 슈파겔(깐마늘은 안 팔아도 깐 슈파겔은 파는 걸 보면 이건 그만큼 중요한 거다)과 감자를 요리해서 먹으면서 마지막편을 봤다. 까먹기 전에 이야기하고 싶어서 저녁을 소화시키면서 이걸 써본다.
<파친코>는 여러모로 나한테 소중한 작품인데, 한국 이야기를 한국어보다 영어로 읽으면서 더 가깝게 느낀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줬고, 어떤 매개체가 되어주기도 했고, 나의 한국인됨?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어서기도 하다. 이야기는 일제시대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 힘들고 고된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만, 재미교포의 눈으로 한꺼풀 걷힌 상태에서 전달되다 보니 담담하면서도 메시지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달까.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시대가 무얼 던지든 어떻게든 받아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가!!!!!족!!!!!하며 소리치지 않는 느낌이어서 좋았는데, 이건 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인 줄 다 알거라 믿는다.
분명 책과 드라마가 달라 비교하기 어렵지만 굳이 더 좋았던 걸 꼽자면 책이다. 책에서 보여준 인물들은 좀더 거리감 있었고 덕분에 내가 내맘대로 나의 한국인 자아, 이방인 자아, 토박이 자아, 여성 자아, 자식 자아를 대입해가면서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랬듯 드라마 제작팀도 작가도 선택을 한 거겠지만, 나랑은 각도가 좀 달랐던 것 같다. 특히 마지막 편에서 느껴지는 조급함(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 이야기를 더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하는 것 같아 보였다)이나 작위적으로 쑤셔넣어진 역사적 사실 같은 건 참 아쉬웠다 (이것 또한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만 그래?). 전반적으로 솔로몬의 스토리에 손을 많이 댄 건 아마도 이야기를 미국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넣으려고 한 것 같다. 나는 책에서 그린 솔로몬이 마주한 절망의 상황이 더 참혹하고 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이 드라마도 좋았던 건 특히 마지막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지루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짠하지 않은 사람 누구야. 드라마가 책과 다르게 가면서까지 촘촘히 빌드업해온 이야기는 fight back한 사람들이다. 나약하게 역사와 환경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마지못해 살아낸 게 아니고 버텨내고 싸워온 그 과정에 색을 더한 덕에 좀더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할머니의 인터뷰에서,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유없이 방어적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아쉽다는 이야기가 와닿았고, 절대 비교할 게 아니지만 내가 살아온 환경이 형성한 내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루하지 않고 얼마나 걸리든 하염없이 앉아서 듣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 더 많이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진짜 이야기에 굶주린 요즘 사람 여기 있어요.
살면 살수록 자기객관화가 참 어렵다. 생각과 말이 다를 때가 제법 많다.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릴 줄 알지만 그렇다고 저변에 있는 생각을 들여다 보면 100% 떳떳하진 못하다. 여성의 권리는 중요하고 서로 연대해야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같이 일하는 여성 동료들에게 좀더 높은 기준을 들이밀고 날카롭게 대한다. 잘했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지만 서로 피해주지 맙시다,하는 못된 마음이 꼭 속에 숨어있다. 나는 이미 다닐 만큼 다니기도 했고 아직도 제법 다니면서도 에어 트레블에 다시 박차를 가하는 사람들이 나빠보인다. 가능한 거리는 기차를 타며 여행하겠다고 다짐하고서도 그럴 시간과 돈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게 내 행운임을 잊고 산다. 코르셋은 피해야 하지만 내가 한 점 빼는 시술은 그거랑 다른 거라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주근깨 뺄까 고민하는 것도 별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 잘 이용했던 SPA 브랜드를 보면서 답없다는 표정을 짓다가도 그것보단 좀더 나은 급의 브랜드면 좀 나을까 싶어 온라인샵 스크롤을 쉴새 없이 굴리는 걸 보면 이런 위선이 또 어딨나 싶다. 이렇게 적어보는 이유는 내가 마주해야 할 모습들이라서다. 남탓하기 전에 나나 잘 돌보자는 마음. 다들 저마다의 길에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겠지 믿으며 나나 잘하자, 제발 좀.
생각이 잘못된 걸 바꾸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생각이 아직 거기 못 이르렀는데도 바른 말을 하고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하는 게 중요한 건, 내가 그걸 못 가리는 바람에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인내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바꾸되 생각의 재채기처럼 나오는 말들은 입을 가리든지 마스크를 쓰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워들 독일어를 하는데 결국은 퍼즐이니 맞추게 되고 그리고 나서 무슨 단어인지 찾아본다. 오늘은 콘크리트에 해당하는 단어를 모르고 맞췄다. 해외 나와서 사는 매해가 이런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저찌 살아진다.
내 상사가 승급을 했다. 모두가 좀 늦은 승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같은 레벨 남 헤드들은 이미 승급을 했기 때문에.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대상자들 중에 여자가 많지 않았나봐,하는 말을 상사가 보탬과 동시에 팀원 모두 "그런 소리 하지마!!!"하고 막았다. 다른 남자 헤드들은 한 명 빼곤 다 어마어마한 캐릭터들인데,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구조상 계속 싸워야 하고 심지어 잘 싸우는 사람인데도 저런 마음이 한켠에 있구나 싶어 뭔가 슬펐다. 요즘 자기의심을 줄이고 내 일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마인드셋으로 밀어붙이기를 연습하고 있는데 너무 어렵다. 아주아주 예전에 한 동료가 나한테 박사과정 갈 생각 있는 줄 알았다고 했던 말이, 많은 질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다 / 그럴 수도 있다"고 답하는 나를 보면서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논문 쓰는 거 아니라는 피드백도 같은 의미로다가. 이건 극복 가능한 단점일지 성향일지 나도 참 궁금하다. 아무튼 상사의 승급은 주로 부하직원의 승급으로 이어진다는데, 올해 말엔 좋은 일이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