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 아주 오래전부터(그러니까 사춘기가 오기 전부터) 엄마 앞에서 옷을 벗길 꺼려했다. 당연하게도 연의 엄마는 아이와 함께 씻을 수 없었고 아이의 몸을 마음껏 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연이 조금 신기했고, 연의 엄마가 조금 서운하겠다고 생각했다.
첫째, 둘째도 다른데, 피를 나누지 않은 친구는 얼마나 다를까? 우리집 아이와 연은 거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2차 성징이 나타나도 사춘기가 와도 엄마에게 몸을 보이는 일에 후하다.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일은 다반사고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이 없다. 오래전 아기였을 때부터 잘 벗어던지긴 했다.
출산을 했을 때 먼 곳에서 달려온 친언니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이유는 내 동생이 낳은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나를 닮지 않아서. 내가 봐도 제 아빠를 똑 닮았다. 나는 그게 조금 서운했고 엄마를 판박이로 닮은 아이를 보면 날 닮은 아이는 더 사랑스러울까? 그 엄마의 마음을 상상해보곤 했다.
다행히 시간은 나의 편이었다. 아이는 점점 크면서 여느 딸처럼 나를 닮아가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 선 딸이 이렇게 말했다.
“나 진짜 엄마 딸이다.”
거울 속의 우리는 정말 닮았고 아이의 평가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작 외모가 닮았다는 소리일 뿐인데,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엄마를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려서.
나무에 수형이 있다면 몸에는 체형이 있다. 아이의 몸은 예진작부터 날 닮았다. 뼈가 얇고 식탐은 없다. 영유아검진을 할 때마가 몸무게는 늘 20등 안쪽이었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도 몸무게 30kg, 40kg을 넘기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이의 몸무게가 1kg 늘 때마다 축하의 의미로 만원씩 용돈을 주고 있다.
스케일 피규어처럼 나를 일정 비율로 줄여놓은 것처럼 닮은 아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오묘해진다. 괜히 아이 살을 쓱쓱 만져본다. 피부의 질감도 익숙하다. 아이의 몸에 나의 과거가 덧씌워진다. 중학생 시절이었던가. 내 뒤에서 걷던 학생이 다 들리도록 내 종아리를 보며 ‘새 다리’라고 쑥덕거린 기억, 고등학생 때 동급생으로부터 다리가 인형처럼 반듯하단 소리를 듣고 좋았던 기분 등. 그 시절 나는 내 몸이 증거 하는 젊음, 에너지 등이 줄어들고 사라지는 걸 감히 상상도 못 했다. 그 한가운데 있어서 그랬다.
그런데 이제 신체적 기능의 퇴화 같은 노화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나이가 됐다. 그런 일이 드물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내가 어찌할 바도 없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사라질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젊음은 이제 파랑새처럼 날아가버렸다. 이제 내리막길뿐이겠지.
그럴 때 나는 아이를 본다. 내게 위로를 주는 아이의 몸을. 지금은 낡고 지쳤지만 나도 한때 저렇게 생생한 몸을 가졌었다는 분명한 증거. 사라진 줄 알았던 젊음과 생의 에너지는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내게서 아이에게로 건너갔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아이와 나를 잇는 것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환해진다.
내 몸은 결국 아이의 미래일지도. 나는 잠시 빌려 썼을 뿐, 언젠가는 돌려줘야 할 시간 위에 서 있다. 그러니 오늘 먹이고 재우고 가꾸는 일은 아이의 먼 내일을 가꾸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깨 위에 책임이 소복이 쌓인다. 이상하게도, 그 무게가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