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하루에 거울 한 번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종일 옷을 뒤집어 입고 돌아다닌 걸 자기 전 잠옷 갈아입으면서야 알기도 하는 나지만, 외려 사람도 많이 못 만나고 어딜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는 시간 속에 놓이니, 아침마다 엑스트라 민트 잇몸질환 예방 치약이 묻은 칫솔을 물고 거울 앞에 서서 나이 들어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얼굴의 잔주름이 거즈로 뜬 치즈 반죽 같다는 묘사도, 여기저기 접힌 얼굴 살을 누비이불에 빗댄 것도, 팔자 주름 양옆으로 늘어진 볼이 줄을 당긴 주머니 같다는 표현을 읽은 적도 있지만, 자기 얼굴은 평생 언제나(!) 가지고 다닌 만큼이나 좀 지루하기도, 언제부터인가 나날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늘 낯설기도 한 것 같다.
최근에 읽은 다큐멘터리 감독 쉴라 네빈스의 수필에서, 자기가 이렇게 늙도록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탄식에 푹 웃다가,
- 그렇게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
하고 지레 입이 나왔었다.
남편 에코야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렇다지만, 지나가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브라 끈 내려온 것도 넌지시 올려주고, 공공화장실에서 눈치껏 다시 만나지도 않을 사함에게 생리대도 ‘빌려주고’, 목덜미에 기어 나온 상표도 살짝 귀띔해주던 우리 자매님들은 대체 왜 내가 이렇게(?) 되도록 알려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기야 까짓 얼굴 걱정은 몸 걱정에 비하면 허영이 맞다.
무슨 신대륙도 아니고 몸에 무엇을 ‘마침 제때 발견’했다며, 수술하면 된다더라는 말이나,
교내 백일장 입선이라도 한 양 피검사 결과가 어째서 무슨 약을 ‘타 왔’네 하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으면,
물론 그들의 조기’발견’과 ‘치료’’을 기뻐함과 동시에 나는 마음에 합성섬유 스웨터처럼 잘 안 떨어지는 잔잔한 보풀이 인다.
요즘엔 자꾸 건강검진을 해대서 옛날에는 모르고 살다 죽던 몸의 비밀을 어째 생로병사의 비밀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기도 한 거나,
그렇게 중고차 부품처럼 몸의 여기저기를 갈고, 끼니마다 이런저런 약을 배부르도록 한 줌씩 먹고는 그 약의 부작용을 고치는 약을 또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찜찜하고,
그렇게 일껏 검사란 검사는 다 챙겨 하며 살았는데도 발견이 어려운 ‘엉뚱한 다른’ 병으로 갑자기 가 버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이렇게 느닷없이 전염병까지 촌놈 생겁을 주고 나니 ‘조심하는’ 것도 그저 여러모로 지치는 모양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당신의 편할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왜 이리 내 ‘몸’ 속엔 뭐 이렇게 이 작은 내 한 몸도 편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무엇인가’가 많이도 들어 있는 것인가.
이건 뭐 모든 내장이 지뢰밭이다.

삶에는 죽음이 없고, 죽음에는 삶이 없는데 왜 살면서 죽음을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죽음을 걱정할 일이 아니라 살이를 걱정해야 한다고도 한다.
마흔 초반에 고질병으로 좀 오래 앓았을 때, 큰검사를 앞두고 나는 엉뚱하게도 무엇보다 내가 ‘마흔 초반에 죽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나고 분했던 기억이 있다.
그 ‘불행감’이 싫었었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후의 무한대의 시간을 감안, 한 인간의 삶은 어차피 그사이의 짧은 것이므로, 나든 남이든 죽음으로 조금 일찍 ‘잘린’ 시간이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또한, 죽음 뒤의 세상이 미지의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 외에 다른 건 다 아는 것도 아니면서 한 가지 더 모르는 것을 가지고 소란 떨 것도 없는 게, 알고 보면 나는 저승(?)뿐 아니라 몰디브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이걸 흔쾌히 다 인정하고도, 그래도 몸 걱정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사실 ‘곱게 죽으면 다행인데 아플까 봐’ 걱정’인 부분도 많다.

Mary Doria Russell의 책, ‘Children of God’ 에는, ‘통증은 신과 닮아있다. 보이지 않고, 정도를 잴 수 없고, 강력한 것이니까’라는 말이 있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병원에 가면 통증의 정도를 1에서 10 사이 어느 정도냐고 묻곤 하는데, 처음에는, ‘아니, 사람이 아파서 비싼 응급실에 왔으면 대충 너무(?) 아픈 줄 알 것이지 환자 당사자에게 과학적 근거 없는 것을 묻다니 이건 뭐지’, 생각했었는데, 사실 누군가의 고통은,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절대로 어느 정도라고 객관적으로 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맞긴 하다. 누구든 누구에게든 네 건 별거 아니다, 그 정도는 참아라, 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아픈 걸로 말하자면 돈 세다 오만원권 지폐에 손 베도 ‘정말’ 아프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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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사랑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사람을 잃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남겨진 사람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내아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나는 대학 등록금을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되는 것도 기뻤지만 ( 아이가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으며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것도 아주 기뻤다) 이제 죽어도 그럭저럭 아이가 앞가림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질적인 위병이 도져도 마음이 한결 편했다.
옛날에 엄마 어려서 외할아버지가 아주 아프셨을 때, 엄마가 아프면 어린 딸 좋아하는 국수를 사러 진고개 거리에 다녀오시곤 하셨다는 아버지 편찮으시니, 마음도 아팠겠지만, 맏이였던 엄마가 졸지에 소녀 가장되게 생겼다는 게 서러워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 엄마가 고백하신 일이 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반려동물/멸종 위기 동식물 건강을 걱정하는 것은 물론 당사자를 염려하는 마음도 있지만, 내가 ‘남겨짐’을 걱정함도 포함되는 일이다. 그게 그렇게 희안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 남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도,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도 맞다.

이렇게 세상이 죽을까 봐 염려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 같아도 그사이에는 안 살고 싶은 사람도 분명 있다는 걸 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종종, 딱히 죽고 싶다기보다는,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말이지만.
‘이번’ 생은 망했다, 는 말처럼 꿈이 가득한 말이 있을까 말이다.
삶도 원할 때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사실 그게 가능하다면 인류는 맨날 다운 돼서 포맷 해야 하는 윈도우 비스타처럼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 그저 제자리걸음만 하다 말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도 너무 강해서 저 살자고 남을 죽이며 사는 사람도 있고, 책임을 피하려고 피해자는 나 몰라라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많은 응원의 말도 소용없이 삶을 포기해버리게 하는 날카로운 말들도 난무하는 세상이니,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이 기술 발전 말고는 딱히 ‘나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지만, 열심히, 안간힘으로 버티며 살아내다 보면 결국 몰디브에서 마시는 모히토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는 날이 올 경우의 수는 죽은 뒤의 세상이 어떤지를 아는 것보다 확실히 높을 것이다.
그러니 ‘종국에는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고, 영 좋아지지 않는 것 같으면 아직 끝이 아니라서’라는 반 궤변을 믿으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게, 살이는 하나의 장편 스펙터클 블록 버스터 돌비 서라운드 오디오 시스템 3D 아이맥스가 아니고 매번 클리프 행어로 시리즈가 끝나고 새 시리즈가 시작되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로 드러나는, 얇은 합판으로 어설프게 세운 세트에서의 종편 막장 드라마더라.

온라인 게임 동물들의, 만날 때마다 해맑게 웃어주는 얼굴이 다 반갑고 고마운 날도 있지만, 이것들은 맨날 뭐 이렇게 혼자 좋아, 하고 심술이 나는 날도 있는데, 그건 어김없이 마음보다는 육신이 불편할 때다. 전염병이 돌아서 그런지 다들 건강하라는 인사를 자주 주고받는 걸 알면서도 어떤 날은 괜히 내가 이제 건강염려를 따로 들어야 하는 나이인가 싶어 기가 죽는다. 꼰대라 구박도 많이 받지만 사실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혹 방해라도 될까 싶어 눈치도 많이 보게 되는 걸, 한국에 가면 함께 지나는 부모님을 보면서 알게 되었기도 하다.

사실 나는, 죽음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얼결에 병들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을까 봐, 고치지 못하는 병 자체보다 ‘가진 돈 다 쓰고도 못 고치고 죽어버려’ 남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갈까 봐 무서운 거다. 혹시 빈집에서 혼자 죽을지 모른다는 것보다 나는, 맨날 버린다 버린다고 하면서 잠옷으로 입는다고 둔 모가지 늘어진 옷 앞자락에 낮에 아이스크림 먹다 흘린 자국이 남은 채로 발견되는 게 더 싫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보험은 보장이 좋은 걸로 사 두기도 하고, 남은 사람들이 치워야 할 것들을 내가 알아서 정리해두는 스웨덴식 죽음 청소 döstädning 에 관한 책을 읽은 후로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부지런히 ‘뒷’정리를 미리 해두려 노력한다. 살이 관리가 결국은 죽음 관리지 싶어서.
아아, 내가 나이 든 걸 나 외에 누가 제일 잘 알겠는가.
인간 다음으로 제일 똑똑하다는 영장류나 코끼리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꼭 하는 일이 거울 없이는 절대 볼 수 없는 입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는데, 나는 그들만도 못하게 그저 현실을 부인하려 했을 뿐이고 어차피 삭신이 쑤시는 것은 거울로 보이는 것도 아닌 것을.
그러니, 살아가는 건, 거짓말을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나를 ‘속일’ 수 있는 능력과 나의 가열한 희망을 ‘믿어’주는 능력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사벨라 롯셀리니는 언젠가, ‘사는 법은 나이 먹는 법밖에 없는 거야’라고 말해주었다는 엄마 잉그리드 버그만의 말을 추억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더더욱 어쩔 수 없이 무겁고 삐거덕거리는 육신으로도 그래도 ‘두엄 밭에서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말로 그냥 버티는 방법밖에 없지 싶다. 죽는 것도 육신이듯, 버티는 것도 육신이니까. 이게 다, 이 한 몸,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고, 놀고먹자고 하는 일이니까.

나이든다는 것은, 그리하여, (억지로) 겸허해지는 일이다. 무릎 관절은 삐그덕거리고 허벅지 근육이 모자라 어디 숨었는지 노안으로 통 안 보이는 장아찌를 찾으려면 냉장고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당장 지금도 꾸부정하게 앉은 자세도 다시 바로잡아보고, 식단에 야채와 단백질을 골고루 넣고, 귀찮고 바쁜데도 운동을 나갈 뿐이다. 가벼운 에코백으로 환경과 어깨를 동시에 보존하고, 어차피 그만큼 가까이 다가올 사람도 없는데 돋보기 거울 따위는 치워버리고, 단추 달린 옷은 손가락이 말을 안 들어 싫고, 위로 벗는 옷은 어깻죽지가 아파서 고생스럽지만, 노안으로 잘못 끼운 단추를 패션으로 우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법밖에 없다.
아침에 부스스 선 욕실 거울에서는, 피곤할수록 잠을 설쳐 머리는 무겁고 허리는 뻐근하고, 한잠 푹 잘 자고 일어나 좀 나아지기는커녕 그저 매일, 어제보다 하루 더 늙어있는 얼굴을 발견할 뿐일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