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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Jun 17. 2024

관제사가 생각하는 국가별 조종사 이미지

다양한 국적의 항공사가 오가는 인천공항 1터미널과 탑승동의 관제를 하는 날에는 하루에도 수 십 개 나라의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가깝게는 아시아에서부터 멀게는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물론 가장 많이 만나는 건 한국인 조종사이고, 체감상 그다음이 중국인 그리고 미국인이다. 재미있게도 몇 년간 관제를 하며 데이터를 축적하다 보면 나라 별로 큰 특징이 잡히기도 한다.




대한민국

가장 마음 편하게 관제할 수 있는 대상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국인 조종사다.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관제 교신이 조금 어렵게 느껴질 때는 스스럼없이 한국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해도 되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 엉성한 내 영어 발음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인천공항에 자주 왔다 갔다 해서 유도로와 인천공항 도면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더해서는 감사 인사나 덕담을 가장 많이 주고받아서 내적 친밀감이 생길 때도 있다. 가끔은 외국인인 줄 알았던 외항사의 한국인 조종사가 너무나 유창하게 한국어로 작별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1초 정도 놀랐다가 금방 한국어로 다시 반갑게 화답해 준다.



중국

내가 생각하는 중국 조종사의 가장 큰 특징은 복창(Read back)한 관제 지시는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의 억양이 달라서 영어로 편하게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지만, 일단 한 번 확실히 관제지시를 이해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시대로 진행한다. 절대로 지시 위반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장 믿음직스럽기도 한 사람들이다. 또, 웬만하면 비행기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짜증내거나 클레임을 걸지 않는다. 하루에도 꽤 여러 편의 중국 항공사와 교신하지만 이륙 순서가 뒤로 밀려도 그러려니 하고 기다려 주어서 고맙다.



일본

일본과 한국을 잇는 비행편수에 비해 일본 조종사를 만나는 건 조금 어렵다. 인천에서 일본까지 가는 항공편은 대부분 우리나라 항공사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일본 조종사를 만나면 영어 발음에 제대로 일본어 억양의 특징이 묻어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일본 피치항공의 항공편이 가끔 편명 111을 달고 들어올 때가 있는데, 일본 조종사가 이 걸 말할 때 '에아-핏치-왕왕왕!(APJ111)'이라고 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질 때가 있다. 실제로 들어보면 정말 귀엽다. 외국항공사 중에는 중국 항공사와 투 톱으로 관제 지시를 잘 지키는 편이다.




미국/캐나다

발음만으로 미국인인지 캐나다인인지 구분이 어려워서 묶어서 생각해 봤다. 일단 두 아메리카인들은 전체적으로 좀 쿨한 느낌이다. 아빠들이 뿌리는 그 쿨한 스킨향이 나는 사람들이라고 할까? 우리가 느끼기에 살짝 뭐 잘못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해도 '이 정도는 문제가 아니고 조종사 재량이야~'하고 넘어가는 느낌이다. 관제교신에서는 오로지 청각적인 요소에 집중하다 보니, 발화자의 감정이나 기분이 확실히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저 조종사는 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라고 생각하면 대부분 캐나다나 미국 사람들이다. 본인이 가장 편한 언어로 이야기해서 그런지 말투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보통은 정해진 관제지시로 교신하니까 문제가 없지만, 프리토킹이 시작되면 귀를 쫑긋 세우고 뭐라고 얘기하는지 잘 들어야만 한다. 문법도 안 맞고 말도 어색한 영어로 대답하면 눈치껏 잘 알아들어주기도 하고, 관제사가 이해를 못 한 것 같으면 천천히 쉬운 단어로 다시 말해주기도 해서 고맙다.




독일

미국과 캐나다에 비해 조금 서두르는 느낌이 드는 나라가 독일 항공사들이다. 보통은 본인이 진행하는 유도로 앞에 다른 비행기가 있으면 그 비행기가 움직이는 걸 기다렸다가 따라가는데, 독일 조종사들은 다른 길로 가면 안 되겠냐고(Any chance to~?) 늘 물어본다. 그리고 4,000m나 되는 활주로를 다 사용할 필요가 없는지 중간이륙(intersection departure)을 요청해 오는 것도 대부분 독일 조종사였다. 운항에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느낌이 든다.

한 가지 더 두드러지는 특징은 젠틀함이다. 관제사에게 컴플레인을 거는 일이 거의 없으며, 뭔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좋게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첫 교신에 흥겹고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걸어오는 것도 독일 조종사다.




필리핀

인천공항과 자주 왕래하는 동남아에서 필리핀을 꼽은 이유에는 이런 게 있다. 첫째로 영어를 잘한다.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덕분이다. 나도 그렇게 영어에 뛰어난 건 아니지만 웬만한 건 전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한국인 관제사의 콩글리시를 잘 알아듣는 편이다.

필리핀 조종사들은 뭔가 똑똑한 엘리트 집단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후방견인 지시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종사가 이해하기에 조금 어려운 것 같아도 90% 이상은 잘 알아듣고 제대로 이행한다. 아마도 인천공항 차트를 잘 공부하고 와서 우리 공항에서만 하는 절차 숙지가 잘 되어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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