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가방 속.

비슷하지만 달라야 할 순례자의 가방

by yule

까미노에서 실제로 들고 다닌 물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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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몇 가지 첨언을 하자면...


까미노에서 배낭은 여행 난이도를 결정하는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배낭을 잘 고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블로그나 카페를 보면 까미노를 위한 배낭은 등산배낭 전문 업체(오스프리, 그레고리, 도이터 등)에서 만든 허리 벨트가 있는 30~50리터 등산배낭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 까미노 국룰이 '잘 모르겠다면 오스프리 캐스트럴 38'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배낭의 스펙상 무게인 1.8킬로그램은 다른 선택지와 비교했을 때 용량 대비 무겁다고 보지만 (1.4킬로그램과 1.8킬로그램의 차이는 감이 잘 안 올 수 있지만 배낭을 가벼운 것을 들고 다니면 330밀리리터 생수병에 과자를 더 들고 다닐 수 있다.) 실제로 까미노에서 사용하던 H를 보니 괜찮은 것 같다. 배낭이 크면 무게도 무거워지고 빈 공간에 짐을 하나씩 늘리면 까미노를 실제 걸을 때 매우 고생하기 때문에 짐의 팽창을 적당히 막아줄 수준이 저 정도 사이즈의 가방인 것 같다. 그러나 배낭과 관련해서 제일 중요한 건 주어진 배낭을 잘 메는 데에 있다. 어깨가 아닌 허리 벨트를 잘 이용해서 하중에 허리 벨트에 걸리고, 어깨끈 길이와 허리 벨트를 잘 조절해서 몸에 최대한 가깝게 배낭을 메고 다녀야 30+일 동안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등산스틱은 살 거면 2개 사는 게 좋다. 매일 까미노를 계속 걸으면 발바닥과 무릎, 발목 등에 부하가 걸리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 하중의 30% 정도를 팔로 옮김으로써 하체를 좀 더 편하게 해주는 게 등산 스틱의 역할이다. (물론 이는 등산스틱을 용도에 맞게 잘 사용할 때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한쪽을 번갈아가면서 쓰면 된다거나 지면에 세 군데 닿게 돼서 안정적이고 앞에 체중을 놓아도 충분히 편해지는 것은 맞지만, 스틱을 한 개만 사용하는 건 몸을 불균형하게 쓰게 만든다. 물론 나 같이 태어나서 처음 등산스틱을 쓰고 어떻게 쓰는지 감을 잡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든다면 같이 다니는 사람들한테 광고 풍선 인형처럼 다닌다고 놀림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중국 항공사는 등산스틱을 들고 비행기를 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우비는 비를 피하기 위해 입지만 바람이 많이 불면 다이소 판초우비는 비닐봉지처럼 휘날린다. 그래서 우비 기능이 진심으로 필요하다면 얇은 우비가 아닌 트레킹용 우비가 필요하다. 단, 한여름인 6월부터 8월까지는 덥기만 할 뿐 비바람이 위협적인 요소가 아니므로 그냥 다이소 우비로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나는 로르카에서 에스테야 가는 길에 비바람을 만난 이후 다음 데카트론이 있는 도시인 로그로뇨에서 바로 우비를 사러 갔다.


이번 휴가는 찐으로 25일 동안 땡볕에서 걷는 여행이었다. 2023년 12월에 갔던 아르헨티나의 경우 현지는 한여름이었는데 선크림도 대충 바르고 다닌 터라 여행 다니는 동안 엄청 태닝 되어서 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나를 보면 엄청 까매졌다고 한 마디씩 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기 전부터 휴가를 다녀와서도 덜 타 보이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했다. 일단 등산모자는 거의 항상 필수였고, 더워도 반팔에 팔토시를 꼭 입었다. 얼굴이 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선크림에 버프까지 쓰고 다녔고 뒷목이 따가우면 손수건이나 스포츠타월로 가리고 다녔다. 또한 손이 탈까 봐 장갑도 준비했는데, 장갑을 끼니 은근히 더워서 장갑은 사실 거의 끼지 않았다. 덕분에 손만 엄청 탔다. 실제로 까미노 프랑스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므로 왼손은 남쪽을 향하고 오른손은 북쪽을 향한다. 당연히 왼손은 걸을 때도 따가운 수준이었고, 바람막이로 나름 가려본다고 했지만 갤럭시 핏을 찼던 부분만 제외하고 색이 변한 게 티가 나는 수준이었다.


난 이전 남미여행에도 여행가방을 끌고 다닐 정도로 무거운 짐을 메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트레킹도 안 좋아해, 걷는 것도 안 좋아해, 짐을 메고 다니는 것도 안 좋아해, 귀찮은 것도 싫어해, 그런데 대체 왜 까미노에 갔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짐은 끌고 다니므로 짐 싸기 계의 미니멀리스트도 아니고 하여 패션 센스와 다른 방향으로 여행에 옷은 꽤 많이 챙겨가는 편인데 일단 이번 여행은 내가 가진 속세의 미련을 내가 이고 지고 가야 하는 관계로 용납가능한 수준에서 짐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까미노에 가져간 게 긴팔 2개, 반팔 4개, 긴바지 2개, 반바지 2개, 바람막이 2개, 경량패딩 1개인데 이 정도면 까미노가 런웨이로 만들 것처럼 옷을 들고 간 수준이다. 게다가 발가락 양말을 4짝, 속옷도 4개씩 챙겨 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보통의 순례자라면 상의, 하의, 양말, 속옷 모두 2벌이 기본 세팅이다. 그러나 난 이 옷을 잠옷처럼 입기도 했으니까 나름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가도 이 정도 세팅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가져갔던 네이비 등산바지는 나중에 사진으로 보니 색깔이 이상한 거 같으니 무채색 바지를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약은 잘 챙겨 온 사람에게 빌붙는 게 최고다. 실제로 의사였던 H는 블로그 하나에 나온 준비물을 전부 들고 왔다며 약은 감기약만 챙겨 왔는데, 생각해 보면 웬만한 약은 현지에서도 구입할 수 있으니 스페인에서 약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나처럼 많이 챙겨갈 필요는 없다. 단, 스페인에서는 후시딘 성분의 연고를 살 때 처방전이 필요하므로 후시딘은 미리 사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은근히 모기는 없어서 벌레 스프레이는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빈대는 까미노 숙소에 있어 제1의 적이고 언제나 문제다. 한국에서 산 빈대퇴치제인 비오킬은 효과가 4주가량 유지된다고 나와있기에 나는 출발하기 직전 배낭과 침낭에 미리 뿌려서 갔다. 미리 뿌려간 효과가 정말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난 침대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빈대를 보았지만 물리지는 않았고, 같이 다녔던 N는 벌레약을 목이 쾌쾌할 정도로 침대에 열심히 뿌렸지만 빈대와 벌레에 꽤 고생했다. 안티푸라민은 첫 며칠을 제외하면 딱히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근육통은 꾸준히 있는 편이므로 파스가 생각보다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근육이완제를 가지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올인원 바디세정제를 챙겨가서 샤워, 샴푸, 세안제로 쓴다는 이야기는 많이 봤지만, 나는 처음부터 다 따로 챙겨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로 가지고 다니는 것 대비해서 무게 차이가 크지 않으니 그냥 따로 가지고 다니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다만 이는 200밀리리터 통으로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여행용 세트로 작게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기초화장품 3종은 나름 25일 동안 알뜰하게 다 썼고 한국에서도 잘 안 쓰던 선스틱은 나가서도 잘 안 썼다.


나 혼자 다닐 때도 빨래를 구분할 용도로 에코백을 챙겨가는 편이지만 이번 까미노에서는 거의 매일 3~4명분의 빨래를 같이 돌리게 되면서 에코백과 장바구니는 여러 명의 빨래를 운반하는 용도로 매우 유용하게 썼다. 다만 장바구니가 방수까지는 되지 않아 덜 마른빨래를 담아서 운반해야 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 드라이백을 대신 챙기기에는 아무리 작은 드라이백이라도 저 가방 3개 합친 것보다 무거울 것이라는 게 흠이다. 원래 까미노에서는 빨래집게나 빨랫줄이 필수이나 거의 매일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는 통에 쓸 일이 거의 없었고, 세탁망과 세탁세제는 필수용품이 되었다. 다음에 가면 시트세제이든 코인세제이든 꼭 챙겨가야겠다. 이번 까미노는 혼자 다닌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 사람들은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라 지금까지의 여행 중 가장 잘 먹고 다녔다. 게다가 같이 다니던 J가 요리사여서 원하면 한국요리도 가능하니 까미노에서 한국 음식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라면 스프가 그대로 남아서 그대로 넘겨주고 돌아왔는데 이는 굉장히 특수한 일행 조합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래는 춥고 힘들 때 라면 스프나 어묵국물 티백으로 국물을 마시면 하루동안 쌓인 여독을 푸는데 제격이다.


다음에 까미노를 걷게 된다면 40리터짜리 배낭을 쓰고 싶은데 배낭을 새로 사는 건 매우 큰 지출이다. 당근마켓을 계속 모니터링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지금까지 다녀와서 다음 순례길에 쓰겠다며 하드쉘 방수 벤틸 자켓과 카본 소재 등산스틱, 미니 헤드랜턴을 구입했는데, 이게 다 합치면 이미 가방 하나 값이라는 건 비밀이다. 그리고 남은 레온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길에 수영장이나 스파가 있는 알베르게도 있다고 하니 수영복도 가져가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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