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한 한국 순례자는 국룰을 좋아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이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어느 길을 통해서 목적지로 향할지부터 마음속으로 고르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80% 이상의 순례자는 (비교적 짧은 영국길, 프리미티보길을 제외한다면)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중 하나를 택하는데 길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나고 기후도 다르니 챙겨야 하는 짐도 조금씩 다르다.
까미노 중 가장 유명한 프랑스길은 첫날이 가장 힘든 길로 유명하다. 첫날이라 아직 몸도 준비가 덜 된 상태이지만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까지 가야 하는데 24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1,250미터를 올라 1,430미터 고지를 찍고 500미터를 내려가야 한다. 날씨가 안 좋아서 비바람을 맞으면서 피레네를 오르면 몸이 적응하기 전에 고생이 배가 된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고지를 2번 더 올라야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중간에는 드넓고 평탄한 메세타 초원을 300킬로미터 가까이 걷게 되지만 한 달 동안 급한 산길을 3번이나 걸어야 하니 무릎 보호는 필수다. 포르투갈길은 이와 비교하면 평지에 가깝다. 특히 대서양 해안을 따라 걷는 포르투갈 해안길을 따라 걷는다면 포르투에서부터는 남산보다 낮은 산을 가끔 오르면서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다만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걸어야 한다. 북쪽길의 경우에는 이베리아 반도 북쪽이 유럽에서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 가는 길에 휴양지에서 노는 사람도 많다고 하고 나름 큰 산을 하나 넘어야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으니 프랑스길과 포르투갈길의 특성이 섞여있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각 길마다 거리의 차이도 있다. 포르투갈길의 경우 리스본에서부터 620킬로미터 정도로 약 25일 정도면 완주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많이 시작하는 포르투에서부터는 245킬로미터이니 10일이면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다. 프랑스길(770킬로미터)에 비해 짧으니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빠듯하다면 포르투갈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산티아고 도착을 위해서 포르투갈길을 걸어볼까에 대해서도 고민했던 적이 있다. 물론 이런저런 후기를 살펴보고 프랑스길을 걷기로 선택했지만.
이에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시설과 안전에 대한 측면에서 프랑스길이 낫다고 판단했다. 내가 갔던 10월만 해도 비수기가 시작되는 때여서 8-9월에 비해 길 위에 순례자가 줄어들고 문을 닫는 알베르게나 바르의 수도 증가한다. 실제로 내가 걷는 동안에도 비수기라며 알베르게가 문을 닫아 그 앞에서 돌아서야만 했던 경우가 있었다. 하물며 프랑스길도 그러한데 북쪽길이나 포르투갈길의 경우 걷는 사람이 더 적은 만큼 성수기가 아니라면 이는 더 심할 것이다. 만일 도착한 마을의 숙소가 자리가 없다면 숙소를 찾아 다음 마을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순례자의 운명이므로 비수기일수록 프랑스길을 걷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다. 최악의 경우 혹시나 아프거나 컨디션이 급격하게 안 좋을 때는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그나마 좀 있어야 길 위의 천사를 만날 수 있다.
둘째로 완주하는 것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완주가 목적이라면 포르투갈길을 선택해서 도전하는 것이 맞겠지만, 출발하는 당시만 해도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내가 과연 등짐을 지고 하루에 20킬로미터 넘게 목표하는 일수만큼 걸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이탈각이 나왔을 때 얼른 스페인 여행으로 돌릴 생각이 농후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까미노를 걸으면서 이번 휴가를 무사히 보내고 한국에 돌아가는 게 이번 휴가의 목적이라면 무리해서 까미노 길 하나를 완주하겠다고 마음먹기보다는 적당히 걸으면서 즐기겠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굳이 완주가 가능한 포르투갈길에 미련을 둘 이유가 적어졌다.
그리고 잘 모를 때 편하게 다니려면 그나마 잘 알려진 곳으로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갈 때는 '다들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의 결말이 프랑스길이었다. 예를 들면 처음 남미 여행을 에콰도르와 콜롬비아만 가고 첫 유럽 여행 행선지로 레이캬비크나 바르샤바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이라면 남미 여행은 반시계 국룰 루트를 따라서 페볼칠아브 가는 것처럼 (아직 주위에 다녀온 사람은 없지만) 까미노를 다녀온 사람이나 까미노를 아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프랑스길만 알고 있는데, 까미노에 관심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맞아요 그거' 하기 위해서는 일단 처음은 남들 다 가는 프랑스길로 가서 '저도 거기 알아요' 하고 다음에 혹시나 기회가 생기면 다른 길을 고려해 보는 게 맞다. 나중에 C에 의해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10월 프랑스길 위에는 한 구간에 많으면 하루에 30명씩 한국인이 있지만, 포르투갈길에는 한 구간에 3명만 있어도 많은 것이었고 한 명 보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들을 종합해 보고 나도 남들처럼 프랑스길로 가야지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는 프랑스길에서 어디를 걸을까를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오픈카톡방도 들어가 보고 다른 순례자들의 후기도 보면서 걸어야 할 구간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후기를 보니 프랑스길 시작 부근에 넘는 피레네 산맥과 이것저것 좋아 보이는 구간이 임팩트가 있어 보이길래 시작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하고 구간을 스킵하면서 걸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 계획을 짤 때는 일단 마드리드에 도착한 후 최대한 빠르게 팜플로나를 거쳐 생장피에드포르로 이동한 뒤 프랑스길을 출발해서 에스떼야까지 가고,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 잠깐 멈췄다가 레온으로 이동해서 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겠다고 정했다. 시간은 부족해도 다른 순례자들이 하는 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계획이었다. 일단 피레네 산맥도 넘어보고, 용서의 언덕을 넘으려면 에스떼야까지는 가야 했다. 그래서 에스떼야 근처에 있는 이라체에서 무료 와인을 준다길래 이건 한번 마셔보고 버스 타고 이동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픈채팅방을 모니터링하다가 까미노 중간에 특이한 숙소가 있다고 추천하길래 그 숙소 위치를 확인해 보니 바로는 못 가더라도 근처의 큰 마을이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여서 거기서 내려서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레온으로 이동해서 12일을 더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계획은 프랑스길 중간의 평탄한 메세타 구간은 전부 건너뛰고 시작과 끝만 걸으면서 험난한 산행을 하는 계획이었으니, 프랑스길을 전부 걸은 순례자들과는 굉장히 다른 프랑스길을 기억하게 만드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프랑스길 중간을 건너뛰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면 완주한 것도 아닌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굳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겠다며 중간을 건너뛰면서 받는 순례자 증명서나 거리 증명서를 받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레온에서만 시작해도 걷는 거리가 300킬로미터가 넘으니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처음에는 휴가를 잘 보내겠다고 까미노 계획을 시작했는데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이 계획은 내가 마지막날까지 하루 25킬로미터 정도씩 걸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세우고 있는 셈이니 까미노 여정의 끝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까미노 출발 며칠 전에 일단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서 버스 이동 없이 가능한 만큼 걸어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혹시 내가 중간에 포기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무사히 목표하는 곳까지 걸을 수 있다면 기회가 될 때 까미노에 다시 와서 나머지 구간을 걷고 전구간 순례 증명서를 받는 것이 훨씬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지도와 거리표를 확인해 보니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레온까지가 470킬로미터 정도 되니 이동을 제외하고 까미노를 걷는 데에 쓸 수 있는 최대 일수인 21일간 무사히 걸으면 레온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좀 더 욕심내서 하루에 25킬로미터씩 걷는다면 아스트로가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어차피 레온이 프랑스길에서는 큰 도시이므로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나 버스도 많은 편이라서 가상의 목표지점으로도 최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레온이나 그보다 멀리 가서 마드리드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면 정말 마드리드는 관광할 시간이 없겠지만, 내 휴가는 온전히 프랑스길을 걷는 데에 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그 정도가 가능하다면 이번 휴가는 처음 생각했던 목적이 충분히 달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