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빠라는 단어가 꼭 사람에만 어울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물건, 어떤 브랜드, 대상이 무엇이든 쉽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면, 금사빠가 아닐까. 다행히 금세 팔린 익숙한 디자인의 운동화와 애정하던 브랜드의 구두를 비우면서 생각한다.
우연히 만난 하나가 좋으니 전부 좋을 거라로 믿어버렸던 과거의 나.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의 밝은 미소 하나가 마음에 들어버리면, 좋은 사람일 거라고 믿어버리는 성급함과 무엇이 다를까.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과 물건에 대한 모순된 나의 반응. 누군가 어떤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면 '좀 더 알아봐야지, 너무 급하잖아,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만나봐'라고 말할 거면서. 스스로도 낯선 타인에게 호감과 호기심을 느낀다면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추고 다가가려고 했을 거면서. 물건 앞에서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 브랜드의 수많은 제품들 중, 딱 한 가지만 경험해 본 주제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음을 정해버렸을까.
'이거 정말 나한테 딱 맞네, 이거 너무 좋은걸, 이게 좋으니까 전부 좋을 거야, 그러니까 다 갖고 싶다.' 어떻게 이런 흐름으로 생각해 버린 걸까?
그렇게 금방 사랑에 빠진 물건들을 사모은 후에 이어지는 것은 후회. 당연하게도 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전부 다 나에게 맞춤처럼 꼭 맞을 리가 없으니까. 전부 다 잘한다고 해도, 더 잘하는 것과 조금 덜 잘하는 게 있기 마련인걸. 부츠가 발에 꼭 맞았던 브랜드에서 산 슬링백은 딱 한 번 신고 나가서 깨닫고 말았다. '불편하구나. 내 발과 맞지 않아서 오래 신고 걷는 것은 그저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구나.'
돌아보니 얼마나 쉽게 '전부'를 기대했는지.
세럼 하나가 너무 괜찮다고 느껴져서 크림, 에센스, 토너, 전부 그 브랜드 제품으로 사들였던 일. 결국 다 쓴 건 처음에 마음에 들었던 세럼 하나뿐. 나머지는 몇 번 쓰다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던 기억.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헛웃음이 난다.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을까? 왜 금사빠의 사랑이 쉬운 시작만큼이나 빠르게 끝나버리는지 알면서, 모든 것이 너무 많아질 때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전부 다 완벽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나에겐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맞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내겐 불편한 사람이 누군가에겐 맞춤옷을 입은 듯 편안한 이가 되어줄 수도 있다. 따스함이 장점인 사람은 그 따스함이 우유부단함이 되어 단점이 될 수 있고, 이성적인 사고가 장점인 사람은 그 냉철함이 차갑게 느껴져 단점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물건도 브랜드도 꼭 그렇다. 내겐 유용한 것이 누군가에겐 거저 준다 해도 필요 없는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관심도 없는 것이 내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어떤 브랜드의 제품도 전부 다 동일하게 매력적일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일인걸.
그러니 내게 꼭 맞는 것,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알아보는 눈을 키워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든 것이 너무 많다,라는 문장 앞에 선 날부터,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그것 아닐까. '알아보는 눈'. 사람도, 물건도, 꼭 맞는 것만을 알아보기 위해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것들과 가볍게 살아가기 위해서.
몇 년째, 여전히 잘 신고 있는 부츠는 깨끗이 닦아 신발장안에 넣어두고, 딱 한번 신은 후로 고이 모셔져 있던 구두는 새로운 주인에게 보내주기로 한다. 내겐 맞지 않아 불편했던 이 신발도, 누군가에겐 꼭 맞는 것이기를 바라며.
이제 더는 금사빠로 살지 말아야지. 사람에게 신중한 만큼이나 물건에게도 조심스럽게 마음을 주어야지. 빈틈이 보이기 시작한 옷장과 신발장을 열어보는 순간마다 다짐하는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