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첫 출근일을 지리산 천왕봉으로
3월을 시작하는 날, 출근을 하지 않게 된 첫날을 맞아 지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을 오르기로 마음 먹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를 달려 남원, 인월을 지나 백무동에 도착했는데 아직 한밤중이다. 집에서 준비해 온 아침 도시락을 차속에서 먹고 동이 트지 않은 등산로로 들어섰다. 랜턴을 켜 어두운 길에 불을 밝히며 걷는다.
온통 세상이 잠든 숲속엔 사각사각하는 내 발걸음 소리와 발굽에 부딪는 돌 자갈 구르는 소리 뿐이다. 등산로 옆 계곡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청아하게 들린다.
한참을 오르자, 점점 날이 밝으며 실핏줄처럼 드러나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아침햇살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반짝이며 쏟아져 내린다. 눈부시게 밝아오는 찬란한 아침은 어둠을 걷어내고 길을 밝히며 새로운 희망을 준다. 자연의 도도한 흐름은 언제나 경외스럽다.
가파른 언덕 길을 올라 능선에 다다르자 칼바람이 엄청나다. 겨울 모자가 준비되지 않아 바람을 막으려고 비닐봉투를 꺼내 뒤집어 쓰기까지 했다. 등산로에는 덜 녹은 눈이 땡땡 얼어붙은 빙판길이 되어 걸음걸이가 여간 힘들지 않다. 제대로 겨울을 맞았다.
이런 추위 때문에 나무에는 눈꽃이 활짝 피었다. 제석봉 구릉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가지에 피어난 하얀 상고대가 장관이다. 오늘 뜻하지 않은 최고의 선물이다.
천왕봉에 당도하여 전망 좋은 곳에 걸터 앉았다. 정상은 늘 평화스럽다. 고요한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며 힘들었던 등정길의 고통을 잊고 성취감으로 힐링 삼매경에 빠져든다. 또한 코로나바이러스 걱정없이 쾌적한 공기를 마음껏 즐긴다.
몇년 전에 아들과 함께 이곳에 올랐던 짜릿한 순간도 떠올려 본다. 산천은 여전한데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오르고 내리며 우리네 삶과 꼭 닮은 산행 길에서 인생을 배운다.
너는 여기 왜 올랐는가?
산행, 마음으로 걷는다.